[진보의 내일을 찾아서] 진보의 성찰3 ‘미국민주당의 혁신은 어떻게 가능했나1(안병진) -강연 다시보기-

미국민주당의 혁신은 어떻게 가능했나 1

80~90년대 민주당 혁신의 명암

 

안병진 (경희사이버대학교 미국학 교수)

오늘부터 2회에 걸쳐 미국의 민주당입니다. 경희사이버대 미국학 교수이신 안병진 선생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 강의는 사실 저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강의입니다. 저는 소박하지만 민주화 운동에 참여를 했었고 그 뒤에 유학을 간 곳이 ‘공적 지식인이 미국을 비판적이고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는 기조로 설립된 미국의 좌파 대학인 ‘존뒤’ 였습니다. 그곳에서의 배움을 통해서 한국정치, 미국정치에 대한 공적 지식인으로서 활동을 하고 싶고 대학교수라는 직함보다는 공정 지식인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한국정치나 미국정치에 대한 여러 문제제기를 던졌었는데요. 제가 민주화운동 시절에 너무나도 많은 오류를 범하면서도 끝까지 평생 간직해야할 화두로서 저는 실사구시를 삼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귀절 중에 하나인데요. 레닌이 파우스트를 즐겨 인용하면서 했던 얘기입니다. “이론이라는 것은 잿빛, 회색빛이다. 오직 푸르른 것은 현실.” 실사구시 정신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는 것이 저의 모토인데, 한국에서 와서 보니까 실사구시에 대한 정신이 강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실사구시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할 이야기가 ‘미국정치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인데요. 지금의 강의 자체가 약간 기묘한,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DLC(Democratic Leadership council)이라고 하는 클린턴과 엘 고어 등의 걸출한 정치인을 양산시킨 중도적 싱크탱크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강의를 부탁하십니다. 그게 저에게 굉장히 이상합니다. 그 이유는 과거 노무현 정부 초기에도 이런 강의부탁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 DLC는 여의도 정치권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했던 이야기였고, 한국도 이제 구진보가 아닌 새로운 진보, 시장 친화적이고 글로벌한 시야에 밝은 그러한 진보로부터 배워야한다는 것이 상식처럼 이야기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에 대한 논의는 오래된 것입니다. 오바마 관련도 강연도 많이 했었지만 이 역시도 기묘합니다. 이렇게 과거에 논의되었던 내용들, 클린턴과 엘 고어의 DLC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백지부터 다시 생각하고 있고, 오바마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강연이 기묘하고 이상하고 또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에서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역사라는 것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고 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지금 미국 DLC를 이야기 할 때가 아니고, 오바마 성공의 교훈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닌 더 많은 것을 이뤘어야 하는 때인데 왜 이러한 과거 다른 성공에 대한 경험을 다시 이야기해야 되는지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지금 한국의 현실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총선, 대선을 보면서 저는 87년의 느낌, 아마추어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과거 87년에 야당에 비해서 민정당 쪽은 놀라운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선거 결과를 거의 예측하고 있었고, 미국의 세계적인 컨설턴트를 통해 선거를 컨설팅 함으로써, ‘보통 사람’ 이라는 미국 캠페인에서 흔히 등장하는 포장을 해낸 반면에 야권의 수준은 상당히 낮았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 진영에서 보여줬던 것은 87년도와 상당히 유사했던 반면에, 과연 야권은 어떤 것이 진보했는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중요한데, 그 전에 던져할 질문은 우리는 왜 미국의 DLC와 같은 경험을 수없이 벤치마킹 하면서도 성공하지 못했을까?, 그들의 성공은 진짜 성공일까 아니면 또 다른 어두운 그림자일까?, 우리나라의 안철수와 문재인 후보는 오바마가 되지 못했을까?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외국으로부터 잘 배워야 할뿐만 아니라, 어쩌면 외국으로부터 배울게 아니라 한국에도 좋은 사례들이 있는데 놓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민주당이 저에게 오바마 강의를 요청했을 때 약간은 도전적인 언어로 미국부터 배우지 말고 오바마가 초등학교 때부터 성장해온 과정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오바마가 가진 지적, 인문학적 깊이는 대단합니다. 한국의 대통령 후보들은 1분에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하질 못합니다. 이것은 사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미국 정치와 한국 정치의 분명한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를 무조건 벤치마킹할 것이 아니라 광우병 촛불시위때 나눔문화라는 단체가 촛불소녀라는 아이콘을 탄생시킬 수 있었는지,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등을 보는 것이 중요한 합니다. 외국을 벤치마킹 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어떻게 성공했는가’ 가 아닌 ‘우리는 왜 실패하는가’에 대한 정교한 분석, 판단을 실시하고 그것을 통해 준비가 필요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국의 교훈을 얻으려고 할 때 실사구시적 자세에서 출발해야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배웠던 은사들의 프레임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한국이 미국적 민주주의로 가야 할 것이냐, 유럽적 민주주의로 가야 할 것이냐 라고 하는 논쟁에서 유럽적 민주주의로 가야한다는 최장집 교수님의 논의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 최장집 교수님을 비롯한 여타의 분들이 주장하는 유럽적 민주주의로 가야한다거나 가고 싶다는 당위, 자신들이 유학시절에 교과서로 배웠던 지식으로 출발해 한국사회를 재단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예전에 유시민 전 장관이 유럽식 기간정당, 카드르정당을 추구한 적이 있는데 실패했습니다. 본인들이 과거 운동권 시절, 유학시절에 규범적으로 추구했던 것에 기반하면 실패합니다. 현재 한국사회가 어떻게 가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추세 속에서 외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 때문에 미국의 경험을 배울 때 과거 20세기의 교과서에 기반 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만드는 집단지성의 힘을 이해하고 이것을 정당과 정치에 반영하면서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최근에 제가 시민정치운동의 중립성테제의 시대는 지났으며 시민정치운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해야 하고 미국의 무브온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강준만 교수님께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강준만 교수님께서는 미국의 무브온을 한국에 이식하려고 하는 시도는 굉장히 위험하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시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안병진 교수가 무조건 미국의 무브온식 정치를 찬양한 것이 아니고 미국의 무브온식 정치가 부정적인 당파적 정치를 지적한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그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꼼수를 비롯한 어떤 시민정치운동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민에 기반한 시민정치운동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본격적으로 다루도록 하고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클린턴 시대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입니다.

그 교훈을 얻을 때 긴 호흡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을 계절로 비유한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즉, 긴 역사의 큰 순환 속에서 어떤 특정한 정치질서를 바라보아야 길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찬 전 총리께 무브온 실험을 하자고 제안하면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께서 이명박 정권에게 선거에 패하고 미국을 방문하셨는데, 그때 충격을 받으셨다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선거에서 이기고 지고 것이 전부가 아니다. 공화당이 선거에서 지는 것보다 자신의 가치와 원칙을 유지하면서 긴 호흡 속에서 정당을 유지해 나아가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선거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거에서 지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긴 호흡과 시야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느 때에는 져야하는 선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의미 있게 져야하는 선거가 있고 타협을 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긴 호흡 속에서 매 시기 정치정세를 보면 이러한 정치정세가 읽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DJP연대, 저는 그때 극명히 반대를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정치의 진화에 필요한 것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DJP연대라는 것은 한국정치의 긴 지그재그 발전 속에서 불가피했던 타협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선거는 그와 달리 의미 있게 장렬히 패배하는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매 시기 선거에 사생결단을 겁니다. 그것은 현실인데요. 우리나라는 선거에서 지면 변호사, 교수들이 아닌 경우에는 우아하게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미국, 유럽으로부터 배워야할 가장 중요한 지점은 긴 호흡 속에 매시기 선거를 볼 수 있는 시대의 결에 대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먹히지 않는 예기를 10년째 하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베리골드워터라는 공화당의 걸출한 거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리골드워터는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보수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보수의 거장입니다. 제가 문국현 회장님에 선거에 나오려고 고민할 때 프리젠테이션을 요청받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회장님, 이번 선거는 당신이 패배해야하는 선거입니다. 이번 선거는 당신의 컨셉을 바꾸는 선거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베리골드워터는 선거 막바지에 정치자금이 예를 들어 3만불이 남았을 때 비서가 “마지막 정치광고를 어느 주에 쏟을까요?” 라는 질문에 베리골드워터는 “존슨이라는 걸출한 후보에게 패배할게 분명한데 왜 돈을 다 써야하는가. 아껴놓았다가 이후 보수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쓰자.”라고 답합니다. 이게 듣기는 쉬운데 선거를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베리골드워터는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보수의 정치세력화에는 성공합니다. 그러면서 닉슨, 레이건과 같은 사람이 베리골드워터라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토대를 통해 대통령이 됩니다. 비록 역사는 대통령이 된 사람만 기억할 뿐이지만 역사의 뒤에 숨어있는 주인공들이 분명이 있습니다. 오바마 역시도 하워드 딘이라는 사람이 없었으면 절대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정교한 분업화는 미국이 긴 호흡 속에서 성공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긴 호흡에 대한 시야로 매 시기 정치정세를 분석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정치세력은 미래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노무현정권이 들어섰을 때, 많은 시민운동가들은 이제 운동적 기반을 크게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청와대 수석과 대학서클 선후배, 형, 아우로 다 통하는 사이에 전화한통화면 해결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시민운동은 거리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화로 해결해 나아가게 되고, 이러면 운동의 에너지는 점차 낮아질 수밖에 없게 되며 따라서 정부가 뿌리내린 기반 역시 활력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이처럼 모든 정치체제는 그러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보는 사람은 노무현 정부 초기에 성공하는 것 같아보여도 그런 흐름을 보면서 전략을 구사하고 운동의 자원을 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긴 호흡 속에서 정치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단기적인 정세, 벤치마킹에 국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상급식 이슈와도 연결됩니다. 이 이슈가 제기됐을 때 이것이 좌파의 시대가 온 것이냐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긴 호흡 속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어떤 담론이 생겼을 때는 지금 시대의 지형은 어떻고, 이 담론은 어떤 위상을 가진 담론이고, 그랬을 때 어떤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나오게 됩니다. 이 당시 김상곤 교육감이 무상급식을 제기했을 때 민주당 몇 몇 의원들이 굉장히 겁을 내셨습니다. 그때 제가 강연에서 어떤 말씀을 드렸냐면 “목숨을 걸고 이거 하십시오. 왜냐하면 무상급식은 좌파의 아젠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사회민주주의시대가 왔다는 시대의 결에 대한 오판을 하게 되고 중산층이 왜 무상급식에 대해 지지를 하게 되는지 면밀한 분석을 하지 못한 채 오바하게 됩니다.

클린턴 시대를 이해하려면 이것 역시 역사의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따라서 민주당의 르네상스, 전성기 시대라고 하는 뉴딜에서부터 시대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지요. 흔히 뉴딜민주당이라고 하면 진보적 성향을 가진 분들은 위대했던 시대로만 기억합니다. 뉴딜은 그 이상으로 위대합니다. 트로이츠키가 전 세계의 영구적 혁명을 이야기 했을 때 왜 미국이 소련에게 먹히지 않았는지 그 비밀은 루즈벨트에게 있습니다. 트로이츠키가 이야기한 영구혁명을 누구보다 잘 적용한 나라가 미국입니다. 미국에는 영구혁명 대신에 바로 영구혁신이 있었습니다. 안철수 교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미국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것인데, 미국이 신자유주적인 나라이고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국가의 역할이 어마어마하며 국가와 자본이 합작해서 만들어내는 혁신의 동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흔히 뉴딜을 테네시 강 유역 개발 토건사업 정도로 이해하는데, 뉴딜이 어떤 것이냐면 노동자, 농민, 자본가와 같은 사람들이 역동적인 균형을 이루면서 소비에트 체제가 할 수 없었던 정치, 경제시스템을 혁신해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치를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바라봐야한다고 말씀 드렸듯이, 진보주의자들은 이것만 보고 뉴딜 민주당 시대의 부작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뉴딜 민주당은 큰 부작용을 양산하는데 잘 나갈 때는 굉장히 역동적이었지만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이익집단들에 기반하게 되면 이 이익집단들이 점차 관료화됩니다. 마치 노무현정권이 들어섰을 때 시민운동가들이 쉽게 전화한통화로 해결해나갔던 것처럼 대의에 충만해서 미국을 잘 바꿔야 한다는, 소련에게 적화통일 되지 않기 위해 긴장을 유지할 때는 잘 나갔지만, 점차 시대가 안정화되면서부터는 다양한 이익집단들에게 파이를 나눠 줘야하는 유착관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자기 세력들에게 떡고물을 지속적으로 나눠 줘야하고 자리를 만들어줘야 하는 이러한 관계, 쉽게 말해서 시니컬한 표현으로 이익집단 liberalism이 형성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 상황에서 미국의 진보들은 새로운 형태의 진보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익집단에 근거한 liberalism이 아닌 새로운 liberalism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또 하나는 한국과 관계있는 이야기입니다. 노무현정권이 정치개혁에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경제, 복지로 넘어가게 되고 이를 넘어서 탈물질적 가치-광우병, 환경, 생태 등-까지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요. 미국도 뉴딜시대를 통해 경제적 만족을 획득하면서 점차 탈물질적 가치에 유권자들과 정치세력층이 생기기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야권의 분열을 가져오는 하나의 신호가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탈물질주의적 가치의 문화적 좌파는 기존 중산층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현재의 대한민국은 미국의 70년대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나꼼수 멤버들 같은 경우 보헤미안적인 모습들이 그러한 전형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70년대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보수의 걸출한 리더인 베리골드워터는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도덕적 쇠태에 대해서 쟁점화를 시킵니다. 김용민 막말사건을 쟁점화했던 것과 똑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68년 미국 민주당은 민권운동의 지도자인 마틴루터킹, 저소득층을 돌보며 진보의 아이콘이 되었던 바비 케네디라는 두 거인이 피살되는 사건과 공화당이 루져라는 별명을 가진 닉슨을 후보로 내세우는 등 절대 질 수 없는 선거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선거가 배워야할 교훈이 당시 미국 68년 선거에 다 담겨있습니다. 미국의 민주당은 트루만, 케네디, 루즈벨트의 정당이었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나의 살림살이를 더 낫게 해주는 정당, 이를 넘어 아메리칸 드림의 정당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미지의 정당에서 68년 이후로 나왔던 후보들은 신좌파 같은 이미지를 가진 후보들이었습니다. 먼데일, 듀카키스 등 후보들이 그러했고, 92년 클린턴에 가서야 살림살이를 낫게 할 것 같은 후보로 변화하게 되면서 집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현재 우리 야권의 정당들이 케네디와 트루만의 정당인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급진적 운동분파에 있었는데 김대중 대통령께서 취임식 연설에서 IMF로 인한 실업자 말씀을 하시면서 목이 메이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트루만, 루즈벨트가 그러한 이미지였는데 68년부터 민주당의 이미지가 사회정의와 평화라는 이미지로 변화합니다. 물론 좋은 가치를 담고 있지만 정의가 자신의 살림살이를 낫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이해로 대중들에게 멀어집니다. 그 당시 시대정신을 잘 대변하는 것이 강남좌파라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전의 미국의 민주당의 루즈벨트, 케네디 모두 백만장자였으나 서민을 위하는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가졌었고, 68년 이후의 민주당은 특권계급, 엘리트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어버렸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도 못해 봤으면서 살림살이 생각은 안하고 낙태, 동성애 같은 것들만 이야기하는 고상한 정당이 되어버립니다. 그러한 때에 기가 막히게 파고 들 수 있는 논리가 강남좌파론입니다.

그 당시 닉슨과 케네디는 굉장히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엄친아의 전형인 케네디에 비교해서 닉슨은 백인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따라서 닉슨은 평생에 걸쳐서 케네디에 대한 열등감을 씻지 못했습니다. 백악관에서 자연스러운 회의를 해도 그러한 열등감들이 들어나는데 그러한 차이가 중산층들의 정서였습니다. 이것이 그 패할 수 없던 선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민으로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닉슨을 선택하게 된 이유였고 중산층, 노동자의 정당에서 liberal, elite 정당으로 변모한 민주당은 패배하게 되며 이후로 이러한 모습을 92년까지 보여줍니다. 과거 태양과 같은 존재로서 민주당, 달의 존재로서 공화당으로 비유되던 것이 68년도부터 역전되기 시작해서 미국판 박근혜라고 할 수 있는 닉슨이 선거에 탁월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닉슨은 자신의 극우적 이미지를 합리적 보수이미지로 바꿨고 복지에 대한 담론을 선취합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께서 김종인 전 총리를 불러오고, 위스콘신 학파 동원을 통해서 규제자본주의를 통한 복지시대 담론을 퍼뜨렸을 때 패배를 예감했습니다. 제가 2001년부터 박근혜시대가 온다고 이야기했을 때 여러 비판을 받았지만 박근혜시대는 결국 왔습니다. 박근혜와 닉슨은 무시할 수 없는 뛰어난 사람입니다. 닉슨이라는 사람은 집권해서 민주당보다 더 나아간 복지를 시도했습니다. 진보의 상징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가 죽기 전에 고백을 하는데 닉슨이 미워서 의료보험개혁에 대해 지지를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오바마가 주장하는 의료보험개혁은 원래 공화당에서 내놓았던 안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박근혜가 닉슨의 2/3만 할 수 있다면 다음 대선에서 야권은 집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당시 선거캠패인 역시 이번 한국선거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문재인 후보께서 훌륭하신 분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재인 후보를 사람들이 노무현 2.0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건 문재인 후보의 한계이도 하고 민주당의 한계이기도 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야권의 한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봉화에 내려가셔서 가장 고민했던 것이 민주주의 사이트 2.0 이었습니다. 아마 민주주의 사이트 2.0과 청와대 국정운영시스템인 이지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노 전 대통령께서 살아계셨다면 노무현 2.0에 대한 많은 고민이 진척됐을지 모르겠습니다. 노무현 2.0이 되지 못했던 문재인 후보는 68년 닉슨과 붙었던 주류 후보 중 하나였던 험프리와 오버랩됩니다. 험프리라는 사람은 노동이라는 화두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진보적인 모습이었지만 이 사람의 한계는 존슨정부의 부통령이었다는 것과 그와 밀약을 맺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존슨은 사람을 개별로 만나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탁월한 모사가였고, 미국의회정치 역사상 가장 탁월하게 의회정치를 구사했던 사람이고 이러한 사람은 앞으로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존슨은 험프리에게 대통령 후보로 비토하지 않는 대신 전쟁을 반대하지 말아달라는 거래를 요구하고 서로 밀약을 맺게 되면서 스탠스가 꼬이게 됩니다. 또 안철수 후보와 매우 닮아있었던 사람이 유진 메카시라는 중도적 진보 후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특기는 사람들이 캠폐인에서 분노와 열정이 달아오르려고 할 때 앞서서 캠폐인의 열기를 진화시키는 것으로서 백년서생 스타일이었습니다. 결국 68년 선거는 야권 후보들의 한계, 닉슨의 중산층에 기반한 캠폐인, 복지담론 장악 등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당시 험프리가 지명이 될 때 밀실해서 담합으로 결정되었는데 신좌파들이 이에 분노하고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맥거번 프레이져 커미션’이라는 정당개혁을 시작합니다. 현재 민주당의 정치혁신위원회에서 정해구 교수님이 하시고 있는 역할처럼 맥거번이 정치혁신위원장을 맡게 되는데 그로 인해 신좌파 세력에 당내 영향력을 부여하게 됩니다. 68년에 서민의 정당의 이미지를 잃어가는 와중에 신좌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70년대에는 완전히 참패하게 되고 닉슨은 재선에서도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민주당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과 다른 점이 있는데 우리는 어마어마한 위기가 있어야 변화와 혁신이 일어나는데 미국은 이 정도의 충격에도 어마어마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대전환의 선거를 겪지 않고도 새로운 정치세력이 욱일승천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한국과의 차이입니다. 제가 4~5년 전부터 민주당 강연에서 위기라는 이야기를 계속 해왔는데 2년 전에 민주당 관계자들이 저에게 제발 위기라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여전히 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2등 브랜드가 1등 브랜드를 어떻게 이기는지 아십니까? 애플이 마이크로소프트를 이기는 방법, 바로 혁명적 수준으로 자신을 바꿀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제발 이렇게 까지 바꾸지 마세요.” 라고 말릴 정도가 되면 2등 브랜드가 1등 브랜드를 잡아먹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그렇게 바꿨고 박근혜 대통령이 천막당사에서 그렇게 바꿨습니다. 이에 대한 흔히 드는 예가 있는데요. 미국의 2등 브랜드가 CEO가 자기네 회사를 폭파하고 잔해로 들어가는 광고를 방영하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경영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일상적인 정치과정 속에서도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는 나라, 그 이유는 우리 보다 훨씬 긴 호흡 속에서 문제를 보고 실사구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당파성 이념이 아닌 데이터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선구자들이 엘 고어, 클린턴, 부루스 리드 등 입니다. 처음에 한국에서 이들은 진보의 이념을 버렸다며 비난을 받습니다. 물론 미국의 자본의 힘에 영합한 면이 있지만 어떻게든지 미국이 우경화되어 가는 추세속에서 진보로서 적응해가려고 하는 노력들은 어느 정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장이 가지는 역동성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들에게는 명과 암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무브온 이야기를 할 때 전제를 둔 것이 있었는데 ‘무브온의 출발은 초당적이다.’ 라는 것이고 당파적 이념적 운동으로 가면 실패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이 미국의 새로운 선구자들은 당의 외부 운동가가 아닌 의원중심의 정당을 고민합니다. 물론 명암이 존재하는데 유럽적 정당이 가진 진보의 힘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원중심의 정당을 고민하면서 슈퍼대의원제를 통해서 외부 운동가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시작합니다. 주지사, 전직 대통령, 전직 부통령 등과 같은 사람들로 당의 당연직 대의원들을 확대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당의 외부세력인 신좌파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80년에 레인건에게 패배하고 84년에 또 패배합니다. 거의 불임정당의 시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제시 젝슨이라는 마틴루터킹과 함께 활동했던 한국의 김근태 의원님과 같은 존경할만한 운동가가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전통적인 진보세력은 불임정당화속에서 새로운 진보를 추구하는 세력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들은 DLC를 Democratic for Leisure Class(유한계급의 정당)이라고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이 진영 돈이 많고 친자본적이고 남부의 인종주의적 성향이 있고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인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많이 받았지만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민주당을 중산층들의 건전한 상식에 기초한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 점에서 한국에도 시사점이 있는데, 스탠리 그랜버그라고 하는 미국의 걸출한 여론조사가는 백인노동자층의 정서를 알아보기 위해서 미시간주의 매콤 카운티를 샘플로 집중적으로 조사를 합니다. 여기서 나온 보고서를 보게 되면 미국 민주당이 왜 불임정당이 되었는지에 대한 모든 답이 나옵니다. 아마 이 보고서를 보게 되면 이번 선거에서의 패배에 대한 많은 시사점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유권자들의 표시인 레이건 민주당, 민주당은 민주당인데 레이건을 좋아하는 민주당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스탠리 그린버그의 조사에 나옵니다. 아마 이번 선거에서도 50, 60대 층에서 이런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대목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근혜 같은 경우가 대중적 보수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왜 선거의 신이냐면 박근혜가 지나가면 그 지역에 지지율이 출렁거립니다.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쓰고 눈물을 흘리며 박근혜 연설을 듣습니다. 이것은 문화적 현상이고 심리적 현상입니다. 미국의 레이건 데모크렛 같은 경우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88년도에 민주당은 또 패배합니다. 엘 고어라는 탁월한 정책가로서의 후보가 있었는데 인터넷 발명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러브스토리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 조롱거리가 되고 대통령이 되지 못합니다. 잘난체하는 liberal 엘리트로서 서민적 감각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시 젝슨이라는 진보운동가에게 패배하는데 만약 그 당시 뉴미디어, 소셜미디어가 있었다면 상황이 다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미국 전역에 각 주마다 DCL라는 새로운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의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고 알칸소라는 시골 주지사이지만 굉장히 신선한 시각과 대중적 카리스마와 정치에 대한 강렬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던 클린턴을 찾아갑니다. 클린턴의 권력의지는 대단했습니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김영삼 전 대통령 수준입니다. 클린턴은 자신의 대학시절 때 내각구성까지 완료했을 정도로 권력의지가 강했습니다. 밤마다 집에 오면 자신이 오늘 만났던 사람들의 데이터베이스까지 정리했습니다. 클린턴은 어쩌면 나폴레옹과 비견할만합니다. 나폴레옹이 10년 전 방문했던 항구의 조수간만의 차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일화들이 있는데 클린턴은 걸어 다니는 정치 사전이었습니다. 78년 알칸소의 선거결과가 민주당이 몇 프로를 얻었고, 72년에는 몇 프로, 쭉 얘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권력의욕이 없는 사람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몰락하는 길입니다. 클린턴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봤고, 가정폭력 속에서 살았고, 그래서 서민의 대통령이 정말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집권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30년 동안 생각했다면 TV토론회에 나와서 준비한 자료가 없다고 헤맬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클린턴과의 결합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엘 고어, 클린턴, 힐러리는 이념적 성향을 떠나서 이런 사람들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불세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 전통적 liberal 집단 중에서 제시 젝슨이 훌륭하지만 낡은 것 아닌가하는 불안해하는 사람들, 비유하자면 문재인 후보의 정책과 살아온 역사는 안철수 후보와 비교할 수 없지만 안철수 후보가 이야기 하는 네트워크, 새로운 대기업에 대한 마인드가 어필 하는 것에 끌렸던 사람들, 미국도 그런 사람들이 결합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국적 망을 만들고 싱크탱크를 만들어 냅니다. 한국 민주당의 민주정책연구원은 아무리 뛰어난 분이 원장을 한다 하더라도 정치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계를 가집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선거결과와 상관없이 10년 후를 보면서 연구원을 운영하라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뿐더러 이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DLC라는 곳에서 했던 싱크탱크는 당으로부터 독립이 되어 있고 충분한 펀드에 기반이 되어 있었습니다. 박원순 시장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은 저도 알지만 한 가지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예외적인 서구적 리더라는 것입니다. 박원순 시장이 수년전부터 했던 “프롤레타리아적인 금욕과 윤리의식을 가지고 살아야하는가, 우리도 미국처럼 돈 많이 주고 젊은 세대들이 자긍심을 가지며 일하면 안 되는가” 라는 이야기는 과거 민주화운동의 패러다임에서 시작한 새로운 시도들의 실패에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경제에서 김광수 연구소 같은 경우에 성공한 케이스지만 정치에서는 성공한 케이스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희 같은 진보교수 쪽에도 후속 세대들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후속 세대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당과 혁신과통합이 통합할 때 제가 강조했던 것이 연수원부터 세계적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연수센터를 통해서 당관료들을 포함해서 모두 평가하며 구글시스템에 기반에서 혁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개개인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현재 정당의 구조와 방식이 그렇습니다. 미국이 1000억을 동원할 수 있다면 우리는 100억도 동원하기 힘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0억으로도 충분한 가능성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긴 호흡 속에서 민주정책연구원나 싱크탱크 같은 곳들이 어마어마한 기반의 미국의 경험을 불가능한 꿈이라고 여길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DLC에 나온 저널들을 보면 놀랄 정도로 탄탄합니다. 그 반면에 한국은 한꺼번에 거대한 실험을 하는 나라입니다. 예를 들면 노무현 정부가 클린턴 정부로부터 도입했던 EITC(근로자소득공제)의 실행을 들 수 있는데요. 미국은 수년의 걸친 실험과 사례연구,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또 실험하는 반복을 거쳐서 실시하게 되는데 반해 우리는 책 한두권으로 정책을 실행해 버립니다. 한국의 모든 미시사회가 일부 영역을 제외하고 다 그렇게 돌아갑니다. 지금 한국의 일부영역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미시적인 디테일의 축적의 것으로 이미 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분당에 NHN 사옥을 만든 조수영 건축가는 심지어 직원들의 양치하는 공간에 대한 결정을 세밀한 조사를 통해 결정하고 배치합니다. 지금 앞으로 야권은 길게 봐야 합니다. 다음 선거도 박원순 시장같은 후보가 있더라도 녹록하지 않습니다. 대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질 수도 있습니다. 긴호흡을 가지고 하나 하나 단단하게 만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은 어마어마한 빅프로젝트 안거드리고 미시적인 것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안희정 도지사의 경우에도 어마어마한 학습을 통해 2년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버렸습니다. 제가 운동을 하면서 누군가와의 토론에서 만큼은 너무도 자신있어했고 그래서 굉장히 오만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미국정치를 배우기 위해서 미국 시의원선거에 존 루라고 하는 후보를 돕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전국적 조직도 만드는 일을 했던 사람이었으니 가르치는 마음으로 존 루의 미디어 코디네이터를 담당했는데, 토론 15분만에 꼬리 내렸습니다. 시의원 후보 조차도 어마어마한 내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전환기에서 배워야할 핵심이 바로 DLC입니다.

물론 클린턴의 DLC는 문제가 많기 하지만, 최소한 진보가 시장을 싫어하는 진보는 아니다는 점에서 성공한 것이고, 글로벌한 것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성공한 것입니다. 애국이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접근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시조에 대한 존경과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진보와 같은 새로운 liberal 가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중산층과 건전한 상식의 기초, 실사구시, 부단하게 진보의 가치를 성찰하고 혁신과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은 클린턴에게 긍정적으로 배워야할 교훈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화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점차 친자본화 되면서 운동적 에너지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고 서민적 어필을 잃어버리게 되고 풀뿌리 운동의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오바마가 등장하게 됩니다. 클린턴시대의 어둠과 오바마의 등장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Q. 사실 민주당의 온지 1년 넘은 상태에서 놀랍고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았는데 첫 번째가 왜 이 당은 당원교육을 하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께 여쭤봤었는데 3개월이 멀다하고 지도부가 바뀌는데 무슨 교육을 진행하겠냐는 답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민주당원이 총 210만당원인데 그 중에 2007년부터 지금까지 3번 이상 당비를 낸 사람을 권리당원으로 인정하고 투표권을 주는 것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요. 근데 그 숫자가 18만밖에 되지 않고 매달 당비를 내는 사람은 거기에서 1/3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처럼 민주당이 매번 말을 바꾸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당원에 기반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기적으로는 힘들겠지만 리더에 의해서 이끌어져가는 당이 아닌 가치, 노선, 철학을 공유하는 진성당원들을 육성하고 그들로부터 리더가 인정받으며 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 유럽형 정당이 어렵다고 말씀 하시는 건지 여쭈고 싶습니다.

A. 당원에 기반한 정당이 안 된다고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한국은 슬프게도 유럽보다 미국에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역동적이고 유럽처럼 계급적 기반이 안정화 되어 있기 보다는 노동의 힘이 갈수록 약화되고, 엘리트들은 시민들을 이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시민들이 훨씬 뛰어난, 시민들의 광범위한 힘이 정치를 부단히 움직이는 추동력인 것. 전 세계적 추세도 시민들의 집단지성에 대한 어마어마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을 때, 당원은 충실히 기반 하되 또한 유동적으로 비당원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 한국 상황에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노조에 기반한 노동당 같은 모델이 20세기에는 타당할지 모르겠는데, 레디컬한 정당이라면 모르겠지만,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라면 조금 더 유동적인 시민들에 기반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심지어 진보정당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해적당 같을 것을 생각할 때 진보적인 정당의 모델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녹색당 같은 흐름은 주목해야 할 흐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억해 보시면 박원순 시장과 민주당의 경선이 당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모바일 만능주의정당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하구요. 당원교육도 진보의 중요한 가치가 협업, 연대아닙니까? 저희의 시대가 왔거든요. 연대의 시대가 왔습니다. 탈자본주의를 고민하는 연대에 시대가 왔는데 슬프게도 한국에서 협력을 가장 잘 교육하고 훈련하는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조선일보 우병현 이사라고 얼마 전 ‘구글을 잘 쓰는 직장인’ 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조선일보의 자회에서에 우병현 이사가 그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1년간 구글이라는 플렛폼에 기반해서 어떻게 하면 협업을 잘 할 것인가를 테스트하고 그 결과를 일원화 했습니다. 구글, 애플이 왜 뛰어난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유는 레디컬을 자본주의에 접목했기 때문입니다. 삼성이 아직까지 애플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유는 운동권이 없어서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새로운 상상력은 코뮤니즘에서 나옵니다. 구글의 주요한 활동가들을 보면 좌파출신입니다. 구글의 플렛폼은 빅브라더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지만 협업의 이상을 지금도 혁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조선일보의 자회사가 1년에 걸쳐서 실험하는데 왜 한국의 진보라는 분들은 못하십니까? 그러면 진보의 깃발 내리셔야 합니다. 제가 진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우리가 보수보다 더 혁신적이고 더 삶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노회찬 대표가 진보정의당에 핸드폰 30개를 나눠주고 실험한다고 하실 때 ‘역시 노선배다.’ 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것이 진보의 자세입니다.

교육 훈련의 부분에서도 민주당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에 대해서 처절히 생각해야 합니다. 10년 전 박노예 시인이 자본은 초단위로 숨 가쁘게 혁신을 하는데, 우리는 자본보다 더 혁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신 그 말씀이 저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Q. 제가 요즘 SNS를 많이 하는데 지금 구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준석, 한정석 등과 같은 보수 인물들인데 그 분들의 글을 볼 때 마다 많은 고민들을 하게 됩니다. 저는 운동권 아버지로부터 이식되어 좌파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 분들의 춈스키 같은 사람들을 비판하고 시장찬양 글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고 그래서 왜 내가 이 글에 반박을 못하는지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강의에서 인물을 키워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앞으로 10년을 바라본다면 제대로 된 좌파적 싱크탱크를 구축해야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 나이 또래(20대)에서 정치에 대한 논쟁을 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지금 새누리당에서는 이준석을 내세우며 청년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버드 출신, 그것은 빈껍데기일 뿐이고 벤처사업도 이룬 것도 하나 없지만 그것이 먹히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은 청년우파모임과 같은 그룹을 통해 체계적으로 청년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저는 누구랑 토론하고 누구랑 공부해야하는 답답합니다. 여기 지식인 분들이 계신다고 한다면 청년들을 키우는 노력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민주당 총선 패배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FTA사건때에도 본질을 보려면 독소조항을 먼저 꺼냈어야 하는데 공론화 시킨 것이 광우병이었습니다. 광우병보다 더 위험한 요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낳을 수 있는 광우병 공론화를 통해서 패배를 좌초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A. 책임을 가지고 앞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Q. 저는 좀 전에 발언했던 분의 바로 이전세대에 속하는데요. 운동권 다음에 미국 민주당의 방식은 소비적인 방식, 정치를 사고 파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그런 느낌이 강한데, 그렇게 해서 가치와 의미를 생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고요. 특히 저희 세대가 느끼는 것은 갈 길을 잃은 막막함, 현실 시장에서 취업도 어렵고 가치를 추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소비적 방식의 정치가 유효한 것인지 어떠한 가치를 생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A. 저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클린턴시대가 가진 한계, 정치를 마케팅화한 측면에서는 그 지적에 동감합니다. 동시에 정치가 가지는 기본적인 전제는 시민들과 소통하고 공감해야한다는 것을 그들은 여론조사나 다양한 기법 등을 통해서 접근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에게 일정정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는 상대에 대해서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취약합니다. 안철수 교수가 청춘콘서트를 하면서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도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고, 자신의 아젠다로 만들려고 했던 노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점에서 클린턴 시대를 특징짓는 한마디, ‘나는 당신의 고통에 공감합니다.(I feel your pain)’ 이라는 것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과 소통하려고 했던 본질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특징인데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 속에서 시민을 바라보려는 것이 여전히 우리 정치에서 강한 것 아닌가, 이러한 관성을 없애는 점에 있어서는 일정의 긍정성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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