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동학 1
-영국노동당의 창당에서 대처 이전까지-
고세훈 (고려대학교 공공행정학과 교수)
<홍세화 선생님 인사>
여러분 반갑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사회복지책마을과 연대해서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프랑스에 있을 때는 어쨌든 경제와 사회가 균형을 이루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는데 한국에서는 경제가 사회와 인간을 압도하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이에 대한 고민들을 이 공간 안에서 함께 공유하고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의 개요
오늘은 노동당의 창당에 초점을 맞추고 발전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개관해보려고 합니다. 다음 주에는 노동당의 이념의 변화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고 박근혜정부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으로 보이는 대처정부가 만들어낸 결과물인 제3의 길에 대해 해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논의하는 것이 진보정치에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을지도 논의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영국 노동당사에 대한 저의 해석과 시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영국에 가면 영국노동당사에 대한 연구 자료가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비교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영국 노동당사가 흐르면서 주옥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탄복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이 우리의 실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국의 경험을 우리나라에 바로 대비시키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고 영국 노동당 사를 살펴보면서 반면교사로 삼고 성찰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국 노동당의 개괄
영국 노동당은 노조 운동의 소동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창당 이후에 노동조합이 노동당정치에 다양하게 관여를 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노조운동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조는 방대한 인적자원과 재정적 자원을 통해 노동당을 지배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 노동당의 정치는 노동조합의 적극적인 관심, 그리고 무관심이 정해주는 한계 한에서 결정되어 왔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실제 노동조합은 노동당의 정책결정기관에 반 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국 노동당의 이념의 흐름에 사실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 운동은 경제적 산업적 이해관계가 심대하게 침해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한 일상적인 당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노조에게 정치는 사실상 부차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노조운동은 단체협상이나 파업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산업적 이해가 침해되었다고 생각될 때 노조운동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당내 소수 좌파들이 노조운동의 동원을 위해서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이들에 의해서 노조운동이 당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당내 좌파가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노조운동을 동원하고 당내 외에 지식인들을 동원하면서 당내 이념, 이론, 정책에 대한 엄청난 논쟁을 만들어내고 결국 당의 급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형태는 30년 대공황, 오일쇼크 등 위기상황에 반복되는 형태입니다.
1979년 마가렛 대처가 수상이 되는데 대처주의는 영국 정치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제3의길은 대처가 바꿔놓은 지형위에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대처정부가 들어서면서 노조운동을 박살내는데 이 이전까지는 노조운동은 노동당 정치를 결정하는 주요 형태였습니다.
노조운동이 급진화 될 때마다 이를 부추기는 세력이 당내 소수 좌파세력인데 이들은 많은 좌파 지식인, 정치인을 동원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 내외에 포진해있다가 때가 될 때마다 노동당정치에 사상, 정책 논쟁에 개입하는 지식인, 정치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노동당 사상의 큰 뿌리 중 하나가 페이비안 주의인데, 지금도 영국 노동당 정치인들 200명 이상이 페이비안협회의 회원들입니다. 대체로 영국노동당의 정치인들과 진보지식인들의 끊임없이 조사하고 탐구하고 읽고 기록하는 전통을 눈여겨 봐야합니다. 예를 들면 강의를 듣는 것보다 발제하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영국 노동당 여성 정치인의 대모 격인 바르라 카셀의 말을 빌려보면 그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정치인이 기록하지 않는 것은 범죄와 같다.” 는 말은 영국 도서관에 가득한 영국 노동당 현직에 몸담은 정치인들이 써낸 일기와 자서전, 회고록, 편지모음 등이 증거입니다. 끊임없는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노동당이 사회주의 이상에 비추어 지금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등을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제3의길도 많은 비판이 있겠지만 ‘이런 것의 소상, 지적 길항의 산물이다.’ 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의 정당체제와도 관련이 있을 텐데 미국 같은 경우는 국회의원 1인당 수십 명의 정책보좌관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가 입법기관으로서 딱히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영국은 정당정치가 중심이기 때문에 정책의 보좌기능은 정당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많은 보좌관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혼자 공부해야하고 그래서 영국정치인들은 실제 지적 탐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합니다. 지식인계가 안정되어있고 그것이 흘러넘쳐서 정치로 유입이 되는 과정은 우리나라와 상당한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진보정치가 혼란상태에 빠져있고 전망자체가 어두운 상황이지만, 가장 큰 실패는 인물을 길러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국 노동당과 비교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 정도를 염두 하면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국 정치의 역사 개괄
노동당은 1900년에 창당합니다. 창당할 때 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지 않는데 이것도 중요한 의미를 같습니다. 노동대표위원회로 창당합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창당했지만 정당이름에 사회주의, 당 어떤 용어도 쓰지 않습니다. 1906년에 돼서야 노동당이라는 당명을 선택하게 됩니다. 1차 대전을 거쳐 1923년에 영국 전통의 양당중 하나인 자유당을 제치고 제2당이 됩니다. 그러면서 처음 집권을 하게 됩니다. 제1당인 보수당이 만만하게 보고 소위 봐준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29년에 최초로 제1당이 되고 2차 집권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과반수 의석을 넘지는 못하는 자유당의 지지를 전제한 집권이었습니다. 노동당이 확실한 절대과반을 가지고 처음 집권한 것이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입니다. 전쟁영웅인 처질이 이끄는 보수당에 압승을 하고 영국 정치에 개혁의 빵빠레를 울립니다. 에틀리 정부가 일련의 국유화, 복지정책을 실시합니다. 50년대 보수당 시대로 가고, 60년대 6년 동안 헤럴드 윌슨이 노동당 정부를 이끌고, 70년 전반에 에드워드 히드가 보수당 정부를 이끌다가 74년부터 79년까지 윌슨과 캘러한이 번갈아가며 노동당 정부를 이끕니다. 그 와중에 아까 얘기했던 노조운동이 때로는 영국 노동당 정부와 협조하고 때로는 반발하면서 갈등관계를 지속합니다. 70년 노동당 윌슨 정부, 74년 보수당 히드 정부, 79년 캘러한 정부가 물러날 때 모두 노조운동의 반발로 물러나게 됩니다. 1979년에 불만의 겨울이라는 유명한 공공노조 파업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 마가렛 대처입니다. 대처는 11년 집권하고 90년에 대처의 후계자인 존 메이져가 97년까지 집권하면서 18년 동안 보수당 지배 속에 있다가 97년에 노동당 토니 블레어가 집권하게 됩니다.
97년부터 2010년까지 노동당이 집권을 하게 되고 2010년에 선거에서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과 자유민주당 닉 클레그의 연정이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국의 진보정치는 노동당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공산당과 같은 군소 정당들도 있지만, 노동당을 비판하고 못마땅해도 결국 노동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합의가 진보정치인, 유권자들에게 암묵적으로 있다고 보입니다. 노동당이 비판을 받는 측면이 있고, 노동당과 관계했던 단체와 사람들이 많이 떠납니다. 그런데 영국 진보정치의 정치적 채널로써 노동당이 점하는 유일한 위상 때문에 결국은 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실험은 실패합니다. 1901년에 노동당에 창당에 깊이 관여했던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사회민주연맹이 탈당해서 사라져 버립니다. 1932년에도 창당에 관여했던 독립노동당이 노동당 지도부의 이념적인 모호함 때문에 탈당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유권자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1981년에 노동당이 급진화 되면서 노동당 내 우파를 이끌었던 4인방이 탈당하면서 사회민주당을 만드는데 역시 실패하고 자유당과 합당해서 현재의 자유민주당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좌, 우에서 노동당을 떠났던 모든 세력들은 정치적으로 얼마가지 않아 생존하지 못했습니다. 영국정치는 결국은 정치적 실천을 위해서 기댈 곳은 노동당뿐이 없다는 것, 일반 유권자들도 영국의 진보정치는 노동당을 통해서 대변될 수밖에 없다는 합의가 암암리에 존재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노동당 창당의 배경
노동당이 창당할 때 개인이 당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제도가 없었고 단체 당원으로만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창당할 때 페이비안소사이어티, 노동조합, 사회민주연맹(마르크스주의단체), 독립노동당 4개 단체가 노동당을 창당합니다. 그런데 독립노동당을 제외하고 3개의 단체는 창당에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노동조합의 경우 19세기 중엽 이후 차티스트 운동이 실패하고 나서 노조운동이 숙련공 중심의 운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숙련공들은 정치활동에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산업, 경제적 권리를 옹호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1860대부터 숙련공조합들은 자유당을 통해서, 소위 자-로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대변할 수 있었습니다. 19세 말에서 20세기 전반기까지 자유당이 굉장히 급진화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자유당 내부의 개혁, 급진세력을 통해 숙련공조합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산업적 이익을 정치적으로 대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태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꿰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900년 노동당 창당에 노조의 2/3는 참여하지 않았고, 거대 노조들은 다 무관심 했습니다. 지극히 일부만 노동당 창당에 관여하게 되는데 1880년부터 비숙련 노조운동이 결성되고, 신노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노조운동이 상당히 활성화되다가 1890년대 법적으로 상당한 철퇴를 맞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최종 판결을 상원에서 하는데, 이때 노조운동이 1800년대에 쌓아왔던 법적권리를 일거에 무효화시켜버립니다. 이제 노조운동에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는 기본적 권리를 누릴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됩니다. 사실 노조운동은 불가피하게 정치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조운동을 법적으로 용인하는 문제가 정치의 문제이고, 합법화 되었다 할지라도 자기의 권리를 계속 유지, 확대하기 위해서 역시 입법이 필요한 것이고, 산업과 시장의 영역이라는 것이 돈의 지배 속에 존재하므로 민주주의라는 정치 영역에서는 형식적일지라도 평등하게 자신의 이익을 대변시킬 수 있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산업적인 투쟁보다 정치적인 투쟁이 유리합니다. 기본적으로 어디에서나 노조운동은 정치화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890년대를 거치면서 노조운동이 구체적인 위기의식을 갖게 되고 당시 13% 정도의 노조 조직률 속에서 1/3 정도가 노동당 창당에 관여하게 됩니다. 노조운동은 노동당창당에 관여하긴 했지만 사회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노동운동의 수세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단체가 페이비안소사이어티인데 이 곳은 상당한 엘리트 집단입니다.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이고, 사회주의의 싱크탱크로서 노동당의 단체회원으로 있습니다. 진보적 단체로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단체이고 가장 많은 성과를 단체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팜플릿, 정책보고서, 세미나개최 등 영국노동당 정치와 사상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록 엘리트주의, 지식주의 등을 견지했지만 지금도 영국 노동당 지도부는 물론이고 150~200명의 노동당 의원들이 공식적인 페이비안소사이어티의 회원으로 있습니다. 이 조직은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이 정치화될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침투와 설득’ 이라는 조직 실천의 방법론을 바탕으로 기존의 정당들에 페이비언소사이어티 회원들이 침투하여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운동의 동반자로써 노동계급을 불신했습니다. 시드니 웹이 저술한 노동조합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노조운동은 기본적으로 단기적인 경제주의에 젖어있기 때문에 이들이 집단적인 정치적 운동체를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지버나드쇼는 “우리는 노동계급을 위해서 일하지만 노동계급과 함께 일하지는 않는다.” “혁명이 노동계급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노동계급에는 희망이 없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노동계급을 통한 대중운동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었지만 결국 창당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인드만이라는 사람의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사회민주연맹이 창당에 동참하는데요. 페이비안 소사이어티를 포함한 이러한 단체들은 모두 1880년대에 생겨났습니다. 비숙련노조가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파업파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비숙련노조원들이 교육수준도 낮고 스스로 조직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기에 사회주의단체들이 대거 개입해서 파업들을 선동하게 됩니다. 성냥공장 여공, 런던부두의 항만노동자들을 조직해서 1886~1889년에 일련의 파업을 일으키는데 성공합니다. 80년대는 사회주의단체들이 진출했던 시기이고, 비숙련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이것을 신노조주의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확대되자 90년대 법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된 것이 노동당 창당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민주연맹도 노동당 창당에 상당히 미온적이었는데, 하인드만이라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고 대중봉기를 통해서 사회변혁을 추구하려던 사람이었으므로, 마지못해 참여했다가 결국은 노동대표위원회(노동당)를 사회주의로 전향시키는데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자 탈퇴한 후 역사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독립노동당이 있습니다. 이 단체만이 영국 노동당 창당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1893년에 영국 노동당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영국의 윤리적 사회주의 전통의 중심적 인물이고, 영국 노동당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리 우는 케어 하디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당시만하더라도 영국사회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므로 언론이나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주류였지만 케어 하디는 영국 노동계급의 정치화에 대해서 크게 희망을 걸지 않았던 집단들을 묶어서 노동당을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케어 하디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어떻게 설득하고 창당대회에서 노동조합을 회유하기 위해서 어떤 배려를 하고, 이런 것들을 보면 상당한 정치적 함의가 담겨있습니다. 이 사람은 철저한 사회주의자였지만, 혁명을 부르짖기보다는 성경 마태복음 5, 6, 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정신에 따라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건설하다는 것이 이 사람의 이상이었고, 그 이상을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통해서 실현하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거의 케어 하디 단독의 노력에 의해서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화에 부정적이었던 세력들을 규합해내고 결국 이것이 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노동대표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사회주의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당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념도 채택하지 않은 채 목표 딱 하나, ‘우리 가능하면 많은 수의 노동계급 대표를 의회에 내보낸다.’ 만 내걸렸습니다. 중장기적 정책전망도 없이 이 하나를 위해 노조운동을 회유해야하고 페이비안소사이어티의 엘리트들을 끌어 모아야 했던 것입니다. 노동대표위원회는 상당히 모호하게, 그리고 초라하게 출발한 것입니다. 출발은 초라했지만 여러 사건들의 계기로 노동당은 빠르게 성장하게 됩니다.
노동당의 성장
창당 이듬해 테프베일사건 -보아전쟁의 특수를 타고 테프베일 이라는 철도회사가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이는데 그 철도회사의 노조원들이 파업을 일으키는데 실패로 돌아간다. 1901년에 이 파업에 대해 상원이 파업으로 테프베일이 입은 손해에 대해 노조가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을 계기로 노동자들이 대거 노동당에 가입하게 되면서 몇 년 사이에 노조원이 두 배로 증가하게 됩니다. 보수당과 자유당의 양당구조의 영국 정치의 현실 속에서 1903년 총선에서 램지맥도날드가 자유당과 선거 협약을 맺어 반보수연맹으로서 단일후보의 선거협약이 이루게 됩니다. 노동당 창당이전에는 노동자 정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당에 급진진형이 존재했었고 이 급진진형이 자-로 공조체제를 이끌었었습니다. 급진진형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셉 챔벌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위스턴 처칠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진보적 자유주의인 신(NEW)자유주의의 이론가(토마스 그윈, 홉하우스, 홉슨 등)들도 자유당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노동대표위원회와 선거 연합이 가능했던 것이고 1903년에 2개 의석에서 1906년 29개 의석을 차지하게 됩니다. 원내 세력이 생기자 그때 비로소 노동당이라는 당명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영국의 복지국가를 이야기 할 때 1900년에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고 1909~1911년에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을 중심으로 영국의 사회복지 개혁정치를 펼치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 복지국가는 본격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이지만 1909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당 입장에서 보면 노동운동이 정치화되었지만 자유당과 공조체제를 유지하는 동안 끊임없이 당내에서 노선 시비와 갈등에 노출되게 됩니다. 노조운동이 경제적으로 자신의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느꼈을 때 정치화를 시도했고, 정치화가 이루어졌지만 자신들의 이익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느껴지자 다시 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1911~1913년에는 생디칼리즘, 작업장운동 등 어마어마한 노조파업이 전개됩니다. 노동당내에 노선 갈등이 발생하고 노조운동이 정치보다는 다시 산업적 투쟁에 눈을 돌리게 되어 노동당으로서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전쟁은 노동당 발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은 물론이고 2차 세계대전은 노동당이 하나의 수권정당으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전쟁 속에서는 전시경제체제를 운영하게 하므로 완전고용이 가능하게 되어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이게 되고 계급적 동질화를 높이게 되면서 공동체 의식을 높이게 됩니다. 거기에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면서 노동계급이 상당히 고무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인 1918년, 영국 노동당에게 가장 중요한 한 해를 맞게 되는데 노동당이 처음으로 사회주의 당헌을 채택하게 됩니다. ‘우리 당의 목표는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공소유에 있다.’ 고 한 그 유명한 조항 4로 명기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당으로 천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당원증에 이 조항 4가 새겨지는데 이것이 1995년까지 지속됩니다. 사회주의 정당으로 천명하고 거기에 걸 맞는 국유화 조치들을 다양하게 정책, 선거강령으로 제시되지만 정권을 잡고서는 그 정신에 걸 맞는 국유화라든가 사회주의 정책을 실천하는데는 굉장히 소극적이었습니다. 1979년 켈러한 정부 때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IMF의 조건을 이행하느라 켈러한이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기껏해야 노동당의 경제정책이 소위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총수요관리를 통해서 투자를 자극하는 경제정책이었는데 ‘케인즈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고용과 복지국가의 수단으로서 노동당에서 케인즈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케인즈주의를 포기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918년에 만든 사회주의 조항은 계속 유지합니다. 독일 사민당이 1959년 당헌 개정을 통해서 완전히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케인즈주의를 채택하게 되는데 영국 노동당은 이상하게 케인즈주의를 먼저 버리고 사회주의 국유화 조항을 계속 유지합니다. 국유화조항을 폐기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전 당원들의 반대로 유지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95년 토니블레어가 성공적으로 완전히 다른 당 목표를 교체하게 되고 문서상으로 1995년에 영국 노동당은 사회주의 정당으로서 종언을 구하게 됩니다.
노동당이 1918년에서 당헌에 조항 4를 만듦으로써 사회주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게 되고, 지금까지 없었던 당의 중장기 정책 강령 ‘노동당과 신사회질서’를 만들게 됩니다. 영국 노동당은 당의 정책강령을 당의 원외조직인 전국집행위원회에서 만들면 그것이 당의 최고정책결정기관인 당 대회에서 인준을 받게 되고 그러게 되면 그것이 당의 10년 정책 기조로 작동하게 됩니다. 즉 10년에 한 번씩 중장기 정책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사이에 있는 선거들은 이미 만들어진 정책 강령을 기초로 해서 선거강령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헌을 사회주의 당헌을 채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1923년, 1929년 사회주의적 선거강령을 만듦으로써 사회주의 정당으로 발돋움 하게 된 것입니다. 또 1918년 기존 단체가입만 가능했던 체제를 바꿈으로서 전국정당으로 체제를 개편하고 선거 체제를 정비하게 됩니다. 즉 지역의 노동단체, 조합들이 노동당의 지구당 역할을 하게 되고 노조의 힘이 조직적으로 더욱 강화되게 됩니다. 노조가 기피했던 사회주의 당헌을 채택하고 선거정당으로 체제를 개편하고 그 과정에서 당내에 노조의 힘이 강해지면서 1923년에 제2당으로 발돋움 하게 됩니다.
이 당시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으로 보수당과 자유당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보수당이 자유당의 내분을 틈타 자유당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동세력의 성장을 얕잡아 보고 노동당에게 집권의 기회를 주게 된 것도 큰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수정당으로서 첫 집권을 하게 되므로 상당히 불안한 집권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정책강령으로 내세웠던 급진적인 정책들은 거의 실천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노동당을 이끌던 맥도날드, 토마스, 스노우덴 등이 경제정책상에 보수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26년에 유명한 전국적 총파업이 일어나게 됩니다. 노동운동은 언제나 정치에서 만족을 못하면 거리로 나가고 거리에서 만족을 못하면 다시 정치로 돌아오는 반복을 거듭하는데, 이 때 총파업이 지금도 수치로 기억되는 실패를 경험하게 되고 1929년 노동당 맥도날드 정부가 과반을 넘지는 못했지만 제 1당으로 집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기가 대공황과 맞물려 있어서 긴축, 실업수당삼감, 미국 원조 등의 문제로 당이 내분상태에 머물게 되고 지도부가 대거 이탈하게 되고, 1932년 총선에서 270석에서 50석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이러면서 1930년대 노동당 안에서 전면적인 정책, 사상, 사회주의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젊은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총동원되어 어마어마한 논쟁을 거쳐서 영국 노동당의 사회주의를 다시 정리하여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를 당목표로 재확인하고 이를 통해 영국의 경제권력이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으로 이동해야한다는 것을 천명하면서 2차 세계대전을 맞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이 영국 노동당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전쟁 내각 구성 5명 중 2명이 당시 수상이 처칠에 의해 노동당 인물들로 채워 집권당은 대외 정책, 전쟁문제에 몰두하고 노동당으로 하여금 국내개혁을 전담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전쟁이 한참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 영국은 종전 이후의 상황을 계획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나온 것이 1942년에 베버리지 보고서가 나오게 되고 영국 노동당뿐만 아니라 보수당에서도 43년에 당대회에서 베버리지 보고서의 내용을 통과시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희생은 소련에 대한 영국국민의 인식을 호의적으로 변화시켜 사회주의를 친숙하게 인식하게 되고, 전시라는 어려운 상황속에서 국민들의 평등화, 동질화의 경험을 통해 계급적 연대가 단단해지고, 전시상황 극복을 위한 노동계급에 대한 회유 정책들로 인해 노동조합이 점차 주류정치의 정당한 일원으로 편입되게 됩니다. 1, 2차 세계대전은 노동계급의 급진화 시키고 종전 이후를 위해 계획된 정책들이 노동조합과 노동당을 중심으로 급진적인 형태로 구성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실시된 총선에서 전쟁영웅인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집권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600석 중 400석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노동당이 전무후무한 압승을 거두게 됩니다. 최초로 과반이상을 통해 집권하게 되면서 에틀리 정부는 그동안 주창해왔던 사회주의정책들인 국유화, 사회복지정책들을 2번의 집권 속에서 전면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국유화의 경우 전 고용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산업을 국유화시킴으로써 서방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유산업을 보유한 국가로 우뚝 서게 되고 NHS를 필두로 한 6개의 복지입법을 통해 가장 선진적인 복지국가를 형성하게 됩니다. NHS 보편적 무료의료서비스 도입의 경우 의사협회 등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50년대까지 좌파운동의 대부로 불리운 나이 베반의 노력으로 인해 성공적인 도입이 가능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노동당이 6년의 집권을 하고 1951년 보수당 처칠정부가 들어서게 된 후 63년까지 이든, 맥밀란, 흄으로 이어지는 집권에 성공합니다. 에틀리 정부 때 8개 산업을 국유화하는데 그 중 특이한 것이 스틸 인 더 스틸이라는 굉장히 많은 이윤을 남기는 철강회사였습니다. 처칠 정부로부터 시작된 13년간의 보수당의 집권기간 동안 이러한 국유화 조치, 복지정책들을 되돌리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데 이때서야 비로소 영국정치가 케인즈주의적 합의정치에 들어섰다고 평가합니다. 굴곡이 있긴 하지만 대처 정부 이전까지 이 골격이 유지되었고 대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골격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실 처칠정부가 국유화 조치들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유화 조치가 사회주의적 조치였다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지점들 때문입니다. 즉, 그때 당시 국유화된 산업들이 사양 산업이거나 전기, 상수도, 석탄 등의 사업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국가가 자본을 투자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거나 공공재적 의미를 갖는 산업들만 국유화를 했던 것이었고, 유일하게 예외였던 것이 철강산업 뿐이었습니다. 원래 국유화 정신이 사회의 핵심적인 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경제 전체를 통제한다는 것인데 그것과 다른 형태의 국유화가 이루어진 것이고 따라서 보수당 처칠 정부가 철강산업만 다시 민영화로 돌려버립니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케인즈주의적 합의의 정치의 시대가 열렸고 이것이 대처정부 이전까지 유지됩니다. 영국의 정치 언론인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버츠켈리즘이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했는데 이는 처칠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버틀러와 노동당의 재무장관이었던 게이츠컬의 이름을 합쳐서 버츠켈리즘이라는 말을 표현하고 영국 합의정치가 보수당과 노동당의 합의를 통해서 막을 올렸다라고 평했습니다. 영국의 보수주의는 현실의 계급적 차이를 용인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상층부의 책임으로 여기는 정통적인 온정주의적 보수주의와 히즈 수상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실패했던 시장자유주의적 보수주의로 나뉘어지는데 대처가 시장자유주의적 보수주의를 성공시키면서 영국 보수주의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대처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보수주의가 노동당과 교차되는 지점들이 많았고 사실 유럽의 복지국가라는 것이 위에서 온정적으로 배풀던가, 밑에서 싸워서 얻어내든가의 혼합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영국의 경우도 싸워서 얻어내는 것과 온정적 시혜의 결합으로 복지국가의 발전이 이루어져 왔으나 대처정부 이후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영국경제의 특이한 점이 파운드에 집착한다는 것인데 파운드를 국가적인 자존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국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부딪혔던 문제가 파운드를 평가절하할 것이냐 그래서 수출을 진작시키고 제조업을 살리고 고용을 늘릴 것이냐 아니면 파운드를 지키고 초긴축 디플레이션 정책을 취할 것이냐 이것이 언제나 영국 정치 좌우에서의 논쟁입니다. 보수당은 파운드를 지키는 것, 노동당은 파운드를 평가절하하자는 것이 언제나 동일한 입장입니다. 영국 경제가 어려워지자 마지못해 노동당 정부가 1949년, 1968년에 파운드의 평가절하를 단행합니다. 평가절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가절하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디플레이션이 이루어져야하므로 그것으로 인해서 경제가 혼란스러워지고 노조운동이 격발이 되고 그러면서 1970년대 초에 노조운동이 급진화 되어 버립니다. 노조운동이 급진화 되면 노동당내의 급진좌파와 진보 지식인들이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노조를 동원해서 당내 공식적인 정책과정을 거쳐 당 정책을 급진화 시키는데 이를 통해 70년대 초 영국이 파업파동을 겪고 노동당정책이 급진화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때 에드워드 히드 수상이 “도대체 누가 영국을 다스리는 것이냐” 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는데 74년 노동당이 승리하게 되고 윌슨 정부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이후 1976년~1979년까지 집권한 켈러한 정부가 노조에게 약속했던 지키지 못하면서 정치로부터 눈을 돌리고 거리로 나가 파업을 일으키게 됩니다. 공공부분의 노동자들까지 파업에 동참하면서 병원, 소방서, 청소 등 사회기능이 마비되는데 이것이 유명한 78~79년 불만의 겨울입니다. 이 불만의 겨울을 겪으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대처입니다.
대처정부의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Q. 교수님께서 영국 노동당 사를 설명하시면서 인물사의 두드러짐에 대해서 설명해주셨고 정치인을 지식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처럼 설명해주셔서 우리 상식과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변호사, 의사, 교수와 같은 직업을 가져야 정치인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은 정치인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정치에서 정치인과 지식인이 함께 갈 수 있었던 바탕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은데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저도 짐작을 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영국의 문화적 전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국 정치계에 지식의 오랜 축적,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열정들이 있습니다. 영국은 우리가 얘기하는 지식층이 현실과 동떨어진 계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 로크, 리카도, 벤담, 밀 등 자유주의의 태동과 변화, 그것이 어떻게 진보와 사회적 자유주의 개념으로 변화하는지가 모두 영국에서 나왔고 나올 때 마다 현실 정치적 상황과 교환하면서 나온 것이지 지식계층에만 의존한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노정치인들이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는 모습들을 실제로 보면서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영국은 한마디로 기록의 나라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학습을 전제로 하고 있고 영국 정치인들은 대부분이 대중서가 아닌 학술서의 버금가는 책을 저술하는 저자들입니다. 이것의 기원이 어딘지는 저도 알 수 있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상층부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지불해야 한다는, 자기들이 누리는 것만큼 사회적으로 소비되어야하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내가 누리는 돈-지식이 개인의 소유라기보다는 사회적 산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듯 합니다. 영국 노동당의 대표적인 정치인들은 마치 통과의례처럼 젊을 때 누구나 노동자, 빈민들을 위한 교육강좌를 여는데 헌신합니다.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같은 문화적인 기반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한국의 정통 야당이라는 민주당이 있습니다. 영국정치가 군소정당의 실험이 실패하고 결국 노동당으로 다시 귀결되는 모습을 이어지는 보인다는 말씀을 주셨는데 한국 역시 많은 정치적 실험들이 실패하고 민주당으로 귀결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민주당이 노동당 만큼 진보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민주당이 비전과 전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새로운 시도들이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결국은 민주당으로 귀결되고 양당제도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첫째, 민주당이 야당의 적통을 잇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고 둘째, 무엇을 계승하고 있느냐, 야당의 적통이라는 것이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민주당은 비어있는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이 반은 시장주의자, 반은 시장을 잘 모르는 모호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진보에 대한 개념규정이 나올 수 있을까 고민이 됩니다. 저는 민주당을 진보정당으로 정립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냥 상식이 통하는 정당으로서 새누리당에 대립하는 양당체제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적 힘은 정치가 급격하게 지형이 재편되지 않으면, 예컨대 선거제도가 대거 비례원칙을 도입한다던가와 같은 획기적인 변화 없이는 당분간 진보의 앞날은 암담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논력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분명히 보고 노력은 하되 도전자체가 어려운 상황이고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제도를 만든다는 의미도 있고, 때로는 사람이 제도의 역할을 해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진보정치의 가장 큰 패착은 사람을 길러내지 못했다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영국이 강령을 1918년에 생산 분배 교환의 공동 소유의 강령을 채택하였는데 NHS이외에 강령에 걸 맞는 정치를 펼친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A. 1918년에 사회주의 당헌을 만들고 정책강령을 만들고 첫 집권을 했지만, 소수정당이었던 만큼 자유당과 정책공조를 해나갔을 뿐이었고, 노동당 단독의 사회주의로 불릴만한 입법을 한 것은 없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실제 진보의 지고지순한 기준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회구성체마다 다르고, 각 나라의 역사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상황은 무시한 채 대한민국의 야당이 진보일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정치가 이렇게 어려운 조건 속에서 진보의 기준을 유럽의 기준으로 맞추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들 환원론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노동당 창당할 때 우리의 모델은 영국의 노동당이었습니다. 영국이 소선거구 제도에서 자유주의 정당을 넘어 양당구조로 들어갔다는 역사적 경험,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경험 하나를 바라보고 따라한 것이었습니다. 10년을 했고, 10년동안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지역구를 얻어낸 경험도 있고, 스스로 이른바 1인 2표제도인 비례대표를 헌법소원을 통해 만들어낸 것 역시 기특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합진보당이라는 이름의 실험을 통해 이루어냈던 선거 연합 등 이러한 실험들을 10년 동안 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노동당 모델을 통해서 보면 독자 정당으로서 실패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라는 물음에 다들 허무하게도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만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누리당이 받아주나요? 혹은 민주당의 시장주의자들이 받아줄까요? 그게 무엇인지 이해도 못할뿐더러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설득도 되지 않습니다. 다 자신의 안정된 지역기반을 가진 사람이 무슨 이유로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겠습니까? 정치의 독점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안하겠다는데 우리는 그것만 얘기하고 현실의 피폐함과 어려움에 대해서는 피합니다. 환원론만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앞으로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만 도입되면 잘 될거야’ 라는 말만 왜 되풀이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답은 없지만 어디가나 학자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현실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 굉장히 중요하지만 힘든 것입니다. 영국도 소선거구제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손보려고 해도 벽에 부딪힙니다. 기득권의 힘이 그렇게 강한 것입니다. 제가 얘기한 것은 민주당의 성격에 대해 진단한 것인데 민주당이 야당 적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 그 적통의 내용이 얼마나 공허한 내용인지 이미 최장집 선생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밝히고 있고 보수주의로 규정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의 기원이 어떻게 시작이 되서 어디까지 와있는지 설명되고 있지 않습니까? 민주당을 적어도 진보와 엮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는 체계를 만들 수 있을만한 바탕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라도 그게 씨가 돼서 쌓아갈 수 있어야 되는데 조금도 없이 혼란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