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내일을 찾아서] 진보의 성찰4 ‘미국민주당의 혁신은 어떻게 가능했나2(안병진) -강연 다시보기-

미국민주당의 혁신은 어떻게 가능했나 2

2004년 이후 시민 네트워크 정당으로의 혁신의 명암

 

 

안병진 (경희사이버대학교 미국학 교수)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요지는 지난 강의와 정반대입니다. 지난 주 클린턴이 마켓팅을 통해 보여준 자본, 과학성의 힘들을 통해 공화당에 승리했던 긍정적인 지점들을 말씀드렸다면, 바로 그 점이 미국 민주당의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이고, 클린턴 제국이 오바마라는 초짜에게 패배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클린턴 시대에 마크 펜이란 자본의 대표적인 마켓팅을 통해 선거에서 승리하기도 했지만 그를 통해 민주당의 진정한 기반이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존재했는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풀뿌리 운동이 기반인 그 민주당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선거를 도와준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귀찮아 진 것입니다. 그저 텔레비전에서 광고로 하면 탁월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경험은 이러한 풀뿌리 운동의 혼과 기반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미국의 탁월한 저널리스트는 이를 사이비 이벤트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이 무엇이냐면 정당의 대변인이 기자회견을 할 때, 30~40명의 수준을 넘지 않는데 이것이 굉장히 이상한 일입니다. 과거의 선거가 대중동원의 선거였다면, 지금의 선거는 기자를 통해 얻는 정보를 가지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미디어의 현실이자 정치현실인 것은 분명한 것이고 분명합니다.

한국도 미국과 영국에서 훈련받은 정치학자들이 정치개혁특위를 하면서 지구당을 없애버립니다. 비효율 구조의 정치를 고친다는 명목으로 대중과의 접촉면을 없애버립니다. 저는 반대한 사람 중 하나였는데 미국조차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정치를 배우기 위해서 선거에 참여했을 때 주로 했던 것이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유권자등록을 받는 일이 었습니다. 가가호호 풀뿌리 접촉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이것에 대한 반성이 지금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클린턴의 실패는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뿐만 아니라 자본에 충실한 정책으로 인해 NAFTA와 같은 북미자유무역협정을 낳아버립니다. 이때 공화당의 엄청난 지지를 얻었고 민주당 일부표와 공화당 다수표의 지지를 얻어 NAFTA를 통과 시켰습니다.

노동층은 엄청나게 분노합니다. 클린턴을 누가 만들었고, 누가 유권자등록을 받았는데, 이러한 배반에 대해 분노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클린턴 섹스스켄들이 터지면서 더욱 위기로 빠져버리게 됩니다. 심지어 백악관 대변인 출신인 조지 스테파노프스라는 정치인은 정신과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클린턴을 도와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사람들, 서민들을 위한 정치를 백악관에서 하고 싶었는데, 하는 일이 고작 공화당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공화당의원들의 뒷조사를 하고 그걸 폭로하여 방어하는 일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클린턴을 이어받는 민주당의 후보들은 클린턴보다 더 엘리트주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엘 고어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부시도 엘리트 출신이지만 부잣집 아들처럼 행동하진 않습니다. 미국선거는 한마디로 정리하면 ‘누가 나의 응접실에서 차를 먹을 것인가’가 선거의 승패를 결정합니다. 고어보다 더 서민의 친구 같은 부시를 미국은 선택한 것입니다. 거기다가 공화당은 칼 노브라고 하는 걸출한 귀재를 갖게 됩니다. 이 사람은 아주 어릴 때부터 정치전략을 훈련받았습니다. 미국은 고3정도면 정치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훈련되어 있습니다. 이제야 우리나라 국제학교 같은 경우는 스포츠를 하거나 디베이트로 갑니다. 우리나라 보수는 천박한 보수입니다. 진정한 보수는 육체의 건강함의 힘을 아는 것이 진짜 보수입니다. 아이들을 보충수업으로 약골로 만드는 보수는 천박한 보수입니다.

칼 노브는 대학 때 이미 상대 캠패인 진영에 스파이를 심어서 그 스파이가 거기에서 실수하도록 만드는 일을 할 정도로 정치적 훈련이 되어있었는데 이것이 발각이 돼서 비난받기도한 일화도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훈련된 칼 노브가 이때 전통적인 캠패인과 상반된 행동합니다. 전통적인 캠패인과 교과서에는 중도 선거에 승리의 비밀 하나가 있는데, 집토끼를 지키고 산토끼를 잡아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칼 노브가 ‘공화당은 집토끼를 동원해서 선거에 나오게 하면 선거에서 이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집토끼를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산토끼를 잡아야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상식이었는데 칼 노브는 집토끼를 동원하는 것을 핵심적 전술로 사용합니다. 굉장한 비난에 시달렸고 민주당에서는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2000년, 2004년 모두 칼 노브가 승리합니다.

그래서 실사구시가 중요합니다. 어쩔 때는 클린턴 시대에서 교훈을 얻고 어쩔 때는 오바마 시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처럼, 정치는 구체적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입니다. 정치학 교수들이 교과서를 어떻게 썼든 1+1=2 라고 해도 그걸 믿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정치분석가들이 항상 선거를 예측할 때 왜 지난 선거를 가지고 얘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가장 먼저 예측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인데 그때 제가 이 예측을 했을 때 주변에서 한국 선거는 51:49 라며 틀린 예측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정치는 언제나 새로운 현실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입각한 분석은 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부시의 시대는 집토끼를 동원해야 이길 수 있는 선거였습니다. 반면 오바마 시대의 선거는 산토끼를 잡아야 이길 수 있는 선거였습니다. 그 시대별로 다른 것이죠. 어쩔 때는 중도가 줄어들 때가 있고 많아 질 때가 있고, 이것은 정서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서 나오는 것이지 과거의 선거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2000년대 초부터 칼 노브와 부시의 결합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냈습니다. 부시가 멍청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부시는 서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우 똑똑한 사람입니다. 부시가 9`11테러 직후 그라운드 제로에 올라가서 화재 진압하는 소방관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소방관들이 잘 안 들린다고 하니까 이런 말을 했습니다. “I can hear you 나는 당신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의법입니다. 내가 당신들의 말을 귀로 들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가슴으로 들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뛰어난 커뮤니케이션을 했던 사람이 부시입니다. 부시가 당선되기 전까지는 상당히 중도적이고 초당적이고 민주당에 협조적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는데 이때 개혁적 보수자인 존 메케인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 자신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링컨과 미국의 문어발식 재벌을 통제했던 시어도르 루즈벨트이었습니다. 시어도르 루즈벨트는 한국의 천박한 보수와 차원이 다른 사람입니다. 길에 널려있는 모든 꽃을 이름을 다 알 만큼 자연을 품고 있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2시간 나눠도 지루하지 않은 사람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생태적이고 친환경적 보수가 형용모순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을 미국의 천박한 보수들이 제어하기 위해 부통령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부통령의 별명이 자명종일만큼 허수아비였기 때문입니다. 근데 대통령이 암살되어버리는 바람에 시어도르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어버립니다. 그는 대통령직에 올라 처음에는 재벌들을 안심을 시켰다가 전격적으로 문어발식 재벌들을 통제해버립니다. 만약 박근혜가 뛰어난 사람이라면 아마 시어도르 루즈벨트를 집중 연구할 것입니다.

이 존 메케인이 부시와 경쟁하면서 등장하는데, 사실 미국의 민주당은 유럽사민주의정당과는 다른 금권주의에 물들어있는 부자들의 정당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존 메케인은 자신의 우상의 모습대로 공화당임에도 불구하고 금권정치타파를 외치며 민주당도 하지 못했던 정치자금개혁을 주도합니다. 그 당시 금권선거타파의 개혁을 추구하다보니 심지어 민주당이 존 메케인을 부통령으로 영입해서 민주당의 후보로 만들려는 움직임까지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민주당은 불임정당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남의 나라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이야 문재인 후보, 안철수 후보와 같은 경쟁력 있는 후보로 대선을 치뤘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내세울 후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진보의 일각에서는 DJP연대처럼 박근혜와 연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 2004년 부시와 존 메케인이라는 좋은 후보들의 경쟁으로 공화당은 계속 승승장구 해나갑니다. 결국 메케인은 공화당 주류들의 벽을 넘지는 못하고 부시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고 부시는 재선에 성공합니다. 이처럼 또 다시 민주당이 패배하지만 2004년 선거에서 불임정당을 벗어날 수 있는 씨앗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씨앗이 전당대회 때 대통령 후보인 캐리를 지지하는 연설에서 발견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오바마 입니다. 이 전당대회 연설은 캐리를 포함한 몇몇이 진행한 것입니다. 이미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바마는 대통령감이라는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거물 정치인들의 유력한 견제가 들어갔을 텐데 미국은 키웠습니다. 오바마를 가장 예뻐했던 사람도 힐러리였습니다. 오바마는 “이제 미국은 공화당의 미국도 아니고 민주당의 미국도 아닌 미국입니다.” 라고 하는 초당적인 연설, 당파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연설을 통해 일약 대권후보로 발돋움 하게 됩니다. 미국은 전당대회에서 그 다음 대선 후보를 등장시키는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인물을 키울 줄 아는 나라인 것입니다. 레이건도 그랬고 항상 그러한 패턴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같은 경우 지난 전당대회에서 누가 연설을 했는지에 대한 무관심은 정치에 대한 시야가 짧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안철수 교수는 어떻게 보면 오바마 이미테이션의 이미지도 있고 로스페로우와 같은 이미지도 있습니다. 로스페로우라는 백만장자는 워싱턴 정치에 질려 자신이 메시아처럼 등장하면 워싱턴의 온갖 진흙탕 같은 정치를 하루아침에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개혁당의 후보가 돼서 등장하는데 엄청난 표를 얻게 됩니다. 일부 정치학자들이 로스페로우가 당선될 것이라고 많은 예측들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근데 로스페로우는 정치 경험이 없었던 CEO이고 철저히 자기중심적 인물이었던지라 쉽게 몰락하고 맙니다. 저는 안철수 교수도 비슷한 성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오바마가 등장할 때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밟는데 안철수 교수는 불행하게도 오바마와 로스페로우의 기질을 합성한 채 선거에 등장한 것입니다. 문재인 이사장님의 경우도 오바마와 같은 기질이 있으신 분입니다. 문재인 이사장님을 처음 대선출마를 결심한 직후 뵈었었는데 그때 제가 “문 이사장님은 시민정치가의 기질이 있으십니다. 여의도에 가도 40년이 지나도 시민의 시각을 잃어버리지 않는 정치가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레이건 대통령도 퇴임할 때 시민정치가라는 별명을 가지고 퇴임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퇴임 후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통해 시민정치가의 별명을 얻으셨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만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당파적인 분이셨는데 문재인 이사장님은 훨씬 더 덜 당파적인 분이십니다. 그런 오바마적 기질을 가지고 계시기는 했지만 대통령적 기질에는 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난 대선에서 확인된 한국정치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2004년에 오바마가 등장할 때 오바마의 맹아로 불리 우는 사람이 또 등장합니다. 바로 하워드 딘이라고 하는 버먼트 주지사였습니다. 하워드 딘이 없었으면 오바마는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워드 딘은 정의하기가 좀 어려운 사람입니다. 열렬한 총기소유 옹호론자, 즉 천박한 보수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라크 전쟁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 묘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미국판 노무현 같은 모습이 나타나는데, 딘을 사랑하는 모임이 결성됩니다. 대통령 후보 연설에서 하워드 딘이 “나는 이라크 전쟁을 반대합니다.” 라고 하며 연설을 시작합니다. 이 당시 이것은 정신 나간 짓이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9`11이후의 미국분위기에서는 비애국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습니다. 근데 캐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뒤에 앉아있던 젊은이들이 우례와 같은 박수와 함께 환성을 보내게 되고 딘풍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배낭을 메고 모여 천막을 치고 노숙을 하며 하우드 딘을 돕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오바마 현상이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철수 현상이 박원순 현상으로 옮겨졌고 안철수의 재등장으로 여전히 유효한 현상임을 확인했는데 만약 다음 대선에서 안철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한국판 하워드 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워드 딘은 기가 막힌 토대를 만들었던 것 일뿐 당시는 아직 시대가 무르익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젊은이들은 인터넷에서 와글와글하면 자연스럽게 표가 오는지 알았습니다. 우리 지난 총선 때 SNS에 사활을 걸었던 것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인터넷에서 환호를 불러일으켰지만 이내 하우드 딘은 꺾여 버립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면 연설 때 괴물처럼 비명을 지르는 모습에 증산층들이 거부감을 느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비록 캐리에게 패배하고 말았지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그때 다 나왔습니다. 더 이상 선거 전문가들만의 선거가 아닌 SNS와 같은 통로를 통해서 유권자들이 얼마든지 함께 모이고 토론하고 동원될 수 있는 신천지를 발견한 선거였습니다. 포털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스타벅스에서 모임을 주최하면 하우드 딘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꽉 채우고 있는 모습, 지금은 일종의 상식적인 모습일지 모르지만 그때 당시에는 신천지 그 자체였습니다. 오바마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면 너무나 간단합니다. 홈페이지에 자신의 우편번호를 입력하면 자신과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연결되는 마법과 같은 기제를 그 당시 처음 발견한 것입니다. 이 당시의 모습에 오바마 승리의 비밀이 다 있습니다. 근데 미국과 한국의 차이가 무엇이냐면, 미국은 모든 비밀이 다 있으면 그것을 분석해 다음 선거에서는 한 단계 진화된 것으로 나아갑니다. 왜? 실사구시의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미국은 소름끼칠 정도로 과학적 분석이 가능한 나라입니다. 클린턴 시대의 살아있는 여론조사가 마크 펜이 정치에서 한 것이 무엇이냐면 여론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수년의 데이터를 축적해서 그것에 딱 부합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클린턴이 TV에 폭력방지칩을 장착하자고 연설을 합니다. 미디어 기관들이 당연히 비판의 수위를 높이지만, 여론조사를 해보면 지지율이 확연히 올라갑니다. 미디어 종사자 엘리트들은 강남좌파들이지 실제 중산층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TV폭력방지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마크 펜과 같은 사람은 수많은 인과관계들을 보면서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무상급식 이슈, 김상곤 교육감님은 탁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발견한 것이지만, 미국은 그것을 수많은 데이터 분석을 통해 발견합니다.

일반 시민 기반의 시민정치운동이 2004년 하워드 딘 돌풍의 배경이었고 정권교체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풀뿌리 시민운동을 잃어버리고 그로부터 유리된 기업컨설턴트가 지배하는 민주당에서 무브온이 등장하게 되면서 일반 민심의 분노에 입각한 민주당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오바마는 이 무브온과 결합하게 되면서 정권교체에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처음에는 초당적 분위기의 무브온을 점차 마이클 무어 감독과 같은 전투적 liberal들이 장악하게 되면서 당파적, 분노, 적개심의 분위기로 변화합니다. 한국에도 이러한 전투적 liberal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의 바로 나꼼수 김어준입니다. 제가 지난번 대선패배 이후 민주당 쪽에 메시지 센터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보수는 메시지에 정교한 사람들인데 왜 진보는 검증되지도 않은 거친 메시지들을 가지고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천안함 문제에 대해서 메시지에 대한 분석 없이 단어들을 사용한다는 것은 중산층의 감정적 문제로 보면 위험한 일입니다. 메시지 센터의 만들자는 제안에 아무도 귀를 기울지 않았고 그래서 저는 실패했는데 김어준은 성공했습니다. 나꼼수라는 메시지센터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 수많은 재생산을 야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역풍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미국에서도 전투적 liberal 들이 지나친 적개심으로 부시를 악마화 하고 부시가 하는 모든 일에 무조건적 반대로 대응하고 그래서 서민들이 느끼기에 좋은 부시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면 그 칼날은 진보를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전투적 liberal 들이 그러한 우를 범했지만, 민주당은 단호하게 거리를 두고 그것을 제어합니다. 한국도 김용민 막말사건을 통해 동일한 사건을 겪은 것입니다. 무브온이라는 것이 그런 점에서 역풍이 있었습니다.

하우드 딘이 결국 당시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자신의 포지션을 잡는데 바로 당의장입니다. 자신의 대통령 꿈은 버리고 민주당을 제대로 바꾸고 정권교체를 해내겠다는 다짐에서 나온 결정입니다. 미국의 거물들이 현명하다는 것은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잘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어릴 적부터 합리적 선택에 대한 훈련이 잘 되어있는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우드 딘이 당의장으로서 당혁신을 주도하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이는 민주당을 풀뿌리정당으로 바꾸기 위한 프로젝트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를 위해 공화당 아성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에 당활동가를 파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데 민주당의 거물전략가 제임스 카빌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오바마는 버지니아, 노스케롤라이나, 사우스케롤라이나 등 공화당의 아성 지역에서도 승리하는 모습을 보이며 하우드 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거기에다 오바마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미국 선거의 귀재로 손꼽히는 람 임마뉴엘이라는 사람이 2006년 중간선거에서 2008년 오바마 승리의 토대를 만듭니다. 람 임마뉴엘이 총선하기 오래전부터 진행한 각 지역별로 보수적, 진보적 그 지역에 맞게 가장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공천을 하게 됩니다. 물론 승리에 집착하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승패만 놓고 보자면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물론 카트리나 재난으로 인해 분위기가 오바마로 넘어간 덕분도 있습니다. 그 재난 이후 2006년부터는 공화당은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을 앞지르지를 못합니다. 게다가 오바마는 힐러리의 당선을 위해 준비했던 모든 것이 오바마를 향하기 시작합니다. 지금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center for american progress’ 라는 헤리티지에 맞선 진보의 싱크탱크이자 메시지 생산 공장, 선거자금, 인맥 등이 모두 힐러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는데 힐러리에 대한 극우들의 마녀사냥과 시민들에 의해 발생된 아래로부터 부는 바람이 이 모든 것이 오바마로 향하게 만들었고 클린턴 제국의 마케팅 대가인 마크 펜조차 이 사실을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진보와 보수의 이념이 절대적으로 나뉘어져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바마가 그렇습니다. 오바마는 그냥 작동하면 된다고 하는 초당적 사고들이 힐러리가 오바마를 이기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근데 서글픈 현실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2008년 오바마 선거를 벤치마킹했다면 대선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2008년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데 미국의 짐 메시나라는 선거전략가는 “2012년 선거는 2008년 선거를 구석기시대로 보이게 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혁신은 자본의 차이를 넘어서 마인드의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한국은 빅데이터는 고사하고 시민들과 공감하고 눈을 맞추는 20세기 초반의 단계부터 훈련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금은 또 다시 모래를 뒤집는 반복되는 느낌입니다. 민주당이라는 자유주의진영이 패배하고 안철수 교수가 돌아왔지만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레프트 진영까지 무너졌습니다. 레프트가 건강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진영은 절대 건강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지금 한국을 심각한 상황으로 보아야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상투적이지만 실사구시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것, 구체적 데이터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리고 싶다.

Q. 계속해서 데이터, 실사구시를 강조하시는데 조지 레이코프나 로크리지 연구소에서 하는 얘기들,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레이건을 투표하는 사람들을 보며 찬성하는 이슈에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따라서 투표를 이중개념주의자로 규정하고 내면의 진보프레임을 깨우기 위한 운동을 2007~2008년 진행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진보가 뺏긴 자유의 가치와 같은 진보의 프레임을 깨우는 운동을 데이터에 대한 강조와 함께 병행해야 하는 것 아닌지 여쭙고 싶습니다.

A. 저도 공감합니다. 한국에서 레이코프 책이 여의도 정치에서 유행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이제 한국의 여의도 정치도 프레임에 관심을 갖는 과학적 정치로 가는구나.’ 하고 기뻐했습니다. 근데 여권은 모르겠지만, 야권의 경우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데이터에 관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데이터 분석과 함께 이를 가치를 표현해내는 노력이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레이코프에 주장은 상당히 타당합니다. 공화당은 자본을 가진 곳이라서 워슬린 같은 사람은 오래전부터 코카콜라 마켓팅에서 이를 적용했던 사람입니다. 맥도날드 광고를 보면 햄버거가 맛있다는 것보다 가족끼리의 외식, 훈훈함과 같은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야권은 이제야 다시 레이코프, 실사구시를 이야기해야만 하는 서글픈 현실인 것 같습니다. 민주당의 민주정책연구원이나 안철수 교수가 신당을 만든다면 일상적인 당원과 지지자에 대한 가치를 입각한 전달 훈련프로그램을 일상적으로 진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Q. 제가 총선에서 대선에서 SNS전략을 담당했었는데 한계와 동시에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조직적으로 촘촘히 조직되지 못해서 일정의 열풍이나 트렌드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선거후 이것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들이 제기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전략을 세우기보다는 후퇴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A. 제 생각에는 많은 분들이 SNS를 여러 가지 홍보매체 중에 하나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바마가 2008, 2012년에 왜 탁월했냐면 SNS라는 영역을 여러 홍보매체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하나의 영역으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총체적 기획을 해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헐리우드의 마켓팅, 대학 등 모든 영역들이 이러한 유기적 연결이 잘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한국이 취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Q. 유럽식 정당이 한국의 맥락에서 현실화되기 어렵고 한국이 유럽보다는 미국을 닮아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이 그러한지 여쭙고 싶습니다.

A. 하나는 정당의 구조가 정당 내외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시대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당같기도 하고 시민단체 같기도 하고 기업 같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원, 지지자, 소비자가 모두 필요한 것이겠지요. 이해찬 전 총리께서 총선 전에 이와 관련해서 ‘이중의 집’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당원이 있는 집 위에 온라인 지지자의 집이 있고 또 그 위에 보통의 시민의 집이 있는 이중 삼중의 형태여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당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쉬운 출입과 이탈이 가능한 이러한 자유로운 형태가 지역주의, 분단 등과 같은 여러 특성에 의해 한국은 미국보다 더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이념에 약화의 추세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당의 강령과 이것에 입각한 당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시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에서는 진보, 안보에서는 보수와 같은 새로운 조합이 일어났을 때 흡수할 수 있는 당의 형태가 유럽식 정당의 형태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Q. 정당 혁신 작업을 하다보면 한국적인 바람직한 정당모델을 설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한국에서의 바람직한 정당모델, 그리고 바람직한 중앙당의 역할을 미국의 경험에 비춰서 여쭙고 싶고, 오바마 같은 경우 보수-진보라는 진영논리를 뛰어넘은 시대전환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지난 주 강연에서는 클린턴의 한계를 뛰어 넘어 민주당의 혼과 가치를 구현한 특성을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영논리를 뛰어넘어 당의 혼과 가치를 구현한 방식은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A. 결국 한국정당도 유권자 정당, 지지자 정당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온라인, 오프라인의 당원을 다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지나치게 선거 때에만 떳다방과 유사한 정당이 된 단점이 있어 꼭 벤치마킹만 해야 할 곳이라는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바마가 무브온에 기반해서 당선되었음에도 이에 반기를 드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그래서 2012년에는 그에 대한 반성이 있었고요. 저희도 그러한 점에서 광범위한 시민정치운동의 힘을 당내에 일상적인 풀뿌리 활동이나 당활동에 잘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원중심의 정당이 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뛰어 넘는 풀뿌리의 일상적 활동과 결합된 정당이면서도 지지자들의 정당, 각 지역별 다양한 분권화된 혁신간의 경쟁이 가능한 정당, 집단 지성 간에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반영되는 정당으로의 설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초당적이면서도 당파적인 것, 굉장히 어려운 것인데요. 무상급식 같은 것이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민주당의 진영논리가 아닌 초당적인 것이면서 또한 당시 민주당의 당파적 이익을 대변한 것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슈를 일반 시민들이 좀 더 잘살고 싶어 하는 욕구에 초점을 맞춘다면 초당적인 태도와 진보적인 태도의 균형을 잘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당이라는 형태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정당의 유통기간, 한계효용이 끝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른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여쭙고 싶고, 미국의 양대정당 문제가 확고한데 미국과 닮아있다는 선생님의 주장에서 우리의 경우 제3당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A.한국의 양당은 그다지 안정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박근혜 정권이 위기 봉착하게 되면 심각한 상태로 빠져버릴 것이고, 민주당 역시 그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안철수진영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고 노회찬, 심상정과 같은 liberal left들도 연대해야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제3당이 위력적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저는 멀리 보면 양당제의 성향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보의 내일을 찾아서] 진보의 성찰3 ‘미국민주당의 혁신은 어떻게 가능했나1(안병진) -강연 다시보기-

미국민주당의 혁신은 어떻게 가능했나 1

80~90년대 민주당 혁신의 명암

 

안병진 (경희사이버대학교 미국학 교수)

오늘부터 2회에 걸쳐 미국의 민주당입니다. 경희사이버대 미국학 교수이신 안병진 선생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 강의는 사실 저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강의입니다. 저는 소박하지만 민주화 운동에 참여를 했었고 그 뒤에 유학을 간 곳이 ‘공적 지식인이 미국을 비판적이고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는 기조로 설립된 미국의 좌파 대학인 ‘존뒤’ 였습니다. 그곳에서의 배움을 통해서 한국정치, 미국정치에 대한 공적 지식인으로서 활동을 하고 싶고 대학교수라는 직함보다는 공정 지식인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한국정치나 미국정치에 대한 여러 문제제기를 던졌었는데요. 제가 민주화운동 시절에 너무나도 많은 오류를 범하면서도 끝까지 평생 간직해야할 화두로서 저는 실사구시를 삼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귀절 중에 하나인데요. 레닌이 파우스트를 즐겨 인용하면서 했던 얘기입니다. “이론이라는 것은 잿빛, 회색빛이다. 오직 푸르른 것은 현실.” 실사구시 정신을 잃어버리지 말아야겠다는 것이 저의 모토인데, 한국에서 와서 보니까 실사구시에 대한 정신이 강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실사구시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 우리가 할 이야기가 ‘미국정치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인데요. 지금의 강의 자체가 약간 기묘한,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DLC(Democratic Leadership council)이라고 하는 클린턴과 엘 고어 등의 걸출한 정치인을 양산시킨 중도적 싱크탱크로부터 교훈을 얻고자 강의를 부탁하십니다. 그게 저에게 굉장히 이상합니다. 그 이유는 과거 노무현 정부 초기에도 이런 강의부탁을 많이 받았는데, 그때 DLC는 여의도 정치권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했던 이야기였고, 한국도 이제 구진보가 아닌 새로운 진보, 시장 친화적이고 글로벌한 시야에 밝은 그러한 진보로부터 배워야한다는 것이 상식처럼 이야기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에 대한 논의는 오래된 것입니다. 오바마 관련도 강연도 많이 했었지만 이 역시도 기묘합니다. 이렇게 과거에 논의되었던 내용들, 클린턴과 엘 고어의 DLC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백지부터 다시 생각하고 있고, 오바마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 강연이 기묘하고 이상하고 또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에서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역사라는 것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고 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지금 미국 DLC를 이야기 할 때가 아니고, 오바마 성공의 교훈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닌 더 많은 것을 이뤘어야 하는 때인데 왜 이러한 과거 다른 성공에 대한 경험을 다시 이야기해야 되는지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지금 한국의 현실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총선, 대선을 보면서 저는 87년의 느낌, 아마추어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과거 87년에 야당에 비해서 민정당 쪽은 놀라운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선거 결과를 거의 예측하고 있었고, 미국의 세계적인 컨설턴트를 통해 선거를 컨설팅 함으로써, ‘보통 사람’ 이라는 미국 캠페인에서 흔히 등장하는 포장을 해낸 반면에 야권의 수준은 상당히 낮았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 진영에서 보여줬던 것은 87년도와 상당히 유사했던 반면에, 과연 야권은 어떤 것이 진보했는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중요한데, 그 전에 던져할 질문은 우리는 왜 미국의 DLC와 같은 경험을 수없이 벤치마킹 하면서도 성공하지 못했을까?, 그들의 성공은 진짜 성공일까 아니면 또 다른 어두운 그림자일까?, 우리나라의 안철수와 문재인 후보는 오바마가 되지 못했을까?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외국으로부터 잘 배워야 할뿐만 아니라, 어쩌면 외국으로부터 배울게 아니라 한국에도 좋은 사례들이 있는데 놓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민주당이 저에게 오바마 강의를 요청했을 때 약간은 도전적인 언어로 미국부터 배우지 말고 오바마가 초등학교 때부터 성장해온 과정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오바마가 가진 지적, 인문학적 깊이는 대단합니다. 한국의 대통령 후보들은 1분에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하질 못합니다. 이것은 사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미국 정치와 한국 정치의 분명한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를 무조건 벤치마킹할 것이 아니라 광우병 촛불시위때 나눔문화라는 단체가 촛불소녀라는 아이콘을 탄생시킬 수 있었는지,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등을 보는 것이 중요한 합니다. 외국을 벤치마킹 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어떻게 성공했는가’ 가 아닌 ‘우리는 왜 실패하는가’에 대한 정교한 분석, 판단을 실시하고 그것을 통해 준비가 필요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국의 교훈을 얻으려고 할 때 실사구시적 자세에서 출발해야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배웠던 은사들의 프레임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한국이 미국적 민주주의로 가야 할 것이냐, 유럽적 민주주의로 가야 할 것이냐 라고 하는 논쟁에서 유럽적 민주주의로 가야한다는 최장집 교수님의 논의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 최장집 교수님을 비롯한 여타의 분들이 주장하는 유럽적 민주주의로 가야한다거나 가고 싶다는 당위, 자신들이 유학시절에 교과서로 배웠던 지식으로 출발해 한국사회를 재단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예전에 유시민 전 장관이 유럽식 기간정당, 카드르정당을 추구한 적이 있는데 실패했습니다. 본인들이 과거 운동권 시절, 유학시절에 규범적으로 추구했던 것에 기반하면 실패합니다. 현재 한국사회가 어떻게 가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추세 속에서 외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 때문에 미국의 경험을 배울 때 과거 20세기의 교과서에 기반 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만드는 집단지성의 힘을 이해하고 이것을 정당과 정치에 반영하면서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최근에 제가 시민정치운동의 중립성테제의 시대는 지났으며 시민정치운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해야 하고 미국의 무브온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강준만 교수님께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강준만 교수님께서는 미국의 무브온을 한국에 이식하려고 하는 시도는 굉장히 위험하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시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안병진 교수가 무조건 미국의 무브온식 정치를 찬양한 것이 아니고 미국의 무브온식 정치가 부정적인 당파적 정치를 지적한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그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꼼수를 비롯한 어떤 시민정치운동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민에 기반한 시민정치운동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본격적으로 다루도록 하고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클린턴 시대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입니다.

그 교훈을 얻을 때 긴 호흡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을 계절로 비유한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즉, 긴 역사의 큰 순환 속에서 어떤 특정한 정치질서를 바라보아야 길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찬 전 총리께 무브온 실험을 하자고 제안하면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께서 이명박 정권에게 선거에 패하고 미국을 방문하셨는데, 그때 충격을 받으셨다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선거에서 이기고 지고 것이 전부가 아니다. 공화당이 선거에서 지는 것보다 자신의 가치와 원칙을 유지하면서 긴 호흡 속에서 정당을 유지해 나아가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선거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거에서 지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긴 호흡과 시야를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느 때에는 져야하는 선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의미 있게 져야하는 선거가 있고 타협을 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긴 호흡 속에서 매 시기 정치정세를 보면 이러한 정치정세가 읽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DJP연대, 저는 그때 극명히 반대를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정치의 진화에 필요한 것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DJP연대라는 것은 한국정치의 긴 지그재그 발전 속에서 불가피했던 타협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선거는 그와 달리 의미 있게 장렬히 패배하는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매 시기 선거에 사생결단을 겁니다. 그것은 현실인데요. 우리나라는 선거에서 지면 변호사, 교수들이 아닌 경우에는 우아하게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미국, 유럽으로부터 배워야할 가장 중요한 지점은 긴 호흡 속에 매시기 선거를 볼 수 있는 시대의 결에 대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먹히지 않는 예기를 10년째 하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가 베리골드워터라는 공화당의 걸출한 거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리골드워터는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지만 보수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보수의 거장입니다. 제가 문국현 회장님에 선거에 나오려고 고민할 때 프리젠테이션을 요청받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회장님, 이번 선거는 당신이 패배해야하는 선거입니다. 이번 선거는 당신의 컨셉을 바꾸는 선거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베리골드워터는 선거 막바지에 정치자금이 예를 들어 3만불이 남았을 때 비서가 “마지막 정치광고를 어느 주에 쏟을까요?” 라는 질문에 베리골드워터는 “존슨이라는 걸출한 후보에게 패배할게 분명한데 왜 돈을 다 써야하는가. 아껴놓았다가 이후 보수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쓰자.”라고 답합니다. 이게 듣기는 쉬운데 선거를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베리골드워터는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보수의 정치세력화에는 성공합니다. 그러면서 닉슨, 레이건과 같은 사람이 베리골드워터라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토대를 통해 대통령이 됩니다. 비록 역사는 대통령이 된 사람만 기억할 뿐이지만 역사의 뒤에 숨어있는 주인공들이 분명이 있습니다. 오바마 역시도 하워드 딘이라는 사람이 없었으면 절대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정교한 분업화는 미국이 긴 호흡 속에서 성공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긴 호흡에 대한 시야로 매 시기 정치정세를 분석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정치세력은 미래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노무현정권이 들어섰을 때, 많은 시민운동가들은 이제 운동적 기반을 크게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청와대 수석과 대학서클 선후배, 형, 아우로 다 통하는 사이에 전화한통화면 해결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시민운동은 거리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화로 해결해 나아가게 되고, 이러면 운동의 에너지는 점차 낮아질 수밖에 없게 되며 따라서 정부가 뿌리내린 기반 역시 활력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이처럼 모든 정치체제는 그러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보는 사람은 노무현 정부 초기에 성공하는 것 같아보여도 그런 흐름을 보면서 전략을 구사하고 운동의 자원을 투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긴 호흡 속에서 정치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단기적인 정세, 벤치마킹에 국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상급식 이슈와도 연결됩니다. 이 이슈가 제기됐을 때 이것이 좌파의 시대가 온 것이냐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긴 호흡 속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어떤 담론이 생겼을 때는 지금 시대의 지형은 어떻고, 이 담론은 어떤 위상을 가진 담론이고, 그랬을 때 어떤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나오게 됩니다. 이 당시 김상곤 교육감이 무상급식을 제기했을 때 민주당 몇 몇 의원들이 굉장히 겁을 내셨습니다. 그때 제가 강연에서 어떤 말씀을 드렸냐면 “목숨을 걸고 이거 하십시오. 왜냐하면 무상급식은 좌파의 아젠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사회민주주의시대가 왔다는 시대의 결에 대한 오판을 하게 되고 중산층이 왜 무상급식에 대해 지지를 하게 되는지 면밀한 분석을 하지 못한 채 오바하게 됩니다.

클린턴 시대를 이해하려면 이것 역시 역사의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따라서 민주당의 르네상스, 전성기 시대라고 하는 뉴딜에서부터 시대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지요. 흔히 뉴딜민주당이라고 하면 진보적 성향을 가진 분들은 위대했던 시대로만 기억합니다. 뉴딜은 그 이상으로 위대합니다. 트로이츠키가 전 세계의 영구적 혁명을 이야기 했을 때 왜 미국이 소련에게 먹히지 않았는지 그 비밀은 루즈벨트에게 있습니다. 트로이츠키가 이야기한 영구혁명을 누구보다 잘 적용한 나라가 미국입니다. 미국에는 영구혁명 대신에 바로 영구혁신이 있었습니다. 안철수 교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미국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는 것인데, 미국이 신자유주적인 나라이고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국가의 역할이 어마어마하며 국가와 자본이 합작해서 만들어내는 혁신의 동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흔히 뉴딜을 테네시 강 유역 개발 토건사업 정도로 이해하는데, 뉴딜이 어떤 것이냐면 노동자, 농민, 자본가와 같은 사람들이 역동적인 균형을 이루면서 소비에트 체제가 할 수 없었던 정치, 경제시스템을 혁신해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치를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바라봐야한다고 말씀 드렸듯이, 진보주의자들은 이것만 보고 뉴딜 민주당 시대의 부작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뉴딜 민주당은 큰 부작용을 양산하는데 잘 나갈 때는 굉장히 역동적이었지만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이익집단들에 기반하게 되면 이 이익집단들이 점차 관료화됩니다. 마치 노무현정권이 들어섰을 때 시민운동가들이 쉽게 전화한통화로 해결해나갔던 것처럼 대의에 충만해서 미국을 잘 바꿔야 한다는, 소련에게 적화통일 되지 않기 위해 긴장을 유지할 때는 잘 나갔지만, 점차 시대가 안정화되면서부터는 다양한 이익집단들에게 파이를 나눠 줘야하는 유착관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자기 세력들에게 떡고물을 지속적으로 나눠 줘야하고 자리를 만들어줘야 하는 이러한 관계, 쉽게 말해서 시니컬한 표현으로 이익집단 liberalism이 형성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 상황에서 미국의 진보들은 새로운 형태의 진보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익집단에 근거한 liberalism이 아닌 새로운 liberalism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또 하나는 한국과 관계있는 이야기입니다. 노무현정권이 정치개혁에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경제, 복지로 넘어가게 되고 이를 넘어서 탈물질적 가치-광우병, 환경, 생태 등-까지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요. 미국도 뉴딜시대를 통해 경제적 만족을 획득하면서 점차 탈물질적 가치에 유권자들과 정치세력층이 생기기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야권의 분열을 가져오는 하나의 신호가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탈물질주의적 가치의 문화적 좌파는 기존 중산층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현재의 대한민국은 미국의 70년대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나꼼수 멤버들 같은 경우 보헤미안적인 모습들이 그러한 전형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70년대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보수의 걸출한 리더인 베리골드워터는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도덕적 쇠태에 대해서 쟁점화를 시킵니다. 김용민 막말사건을 쟁점화했던 것과 똑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68년 미국 민주당은 민권운동의 지도자인 마틴루터킹, 저소득층을 돌보며 진보의 아이콘이 되었던 바비 케네디라는 두 거인이 피살되는 사건과 공화당이 루져라는 별명을 가진 닉슨을 후보로 내세우는 등 절대 질 수 없는 선거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선거가 배워야할 교훈이 당시 미국 68년 선거에 다 담겨있습니다. 미국의 민주당은 트루만, 케네디, 루즈벨트의 정당이었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나의 살림살이를 더 낫게 해주는 정당, 이를 넘어 아메리칸 드림의 정당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미지의 정당에서 68년 이후로 나왔던 후보들은 신좌파 같은 이미지를 가진 후보들이었습니다. 먼데일, 듀카키스 등 후보들이 그러했고, 92년 클린턴에 가서야 살림살이를 낫게 할 것 같은 후보로 변화하게 되면서 집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현재 우리 야권의 정당들이 케네디와 트루만의 정당인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저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급진적 운동분파에 있었는데 김대중 대통령께서 취임식 연설에서 IMF로 인한 실업자 말씀을 하시면서 목이 메이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트루만, 루즈벨트가 그러한 이미지였는데 68년부터 민주당의 이미지가 사회정의와 평화라는 이미지로 변화합니다. 물론 좋은 가치를 담고 있지만 정의가 자신의 살림살이를 낫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이해로 대중들에게 멀어집니다. 그 당시 시대정신을 잘 대변하는 것이 강남좌파라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전의 미국의 민주당의 루즈벨트, 케네디 모두 백만장자였으나 서민을 위하는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가졌었고, 68년 이후의 민주당은 특권계급, 엘리트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어버렸습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도 못해 봤으면서 살림살이 생각은 안하고 낙태, 동성애 같은 것들만 이야기하는 고상한 정당이 되어버립니다. 그러한 때에 기가 막히게 파고 들 수 있는 논리가 강남좌파론입니다.

그 당시 닉슨과 케네디는 굉장히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엄친아의 전형인 케네디에 비교해서 닉슨은 백인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따라서 닉슨은 평생에 걸쳐서 케네디에 대한 열등감을 씻지 못했습니다. 백악관에서 자연스러운 회의를 해도 그러한 열등감들이 들어나는데 그러한 차이가 중산층들의 정서였습니다. 이것이 그 패할 수 없던 선거 상황에서 사람들은 서민으로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닉슨을 선택하게 된 이유였고 중산층, 노동자의 정당에서 liberal, elite 정당으로 변모한 민주당은 패배하게 되며 이후로 이러한 모습을 92년까지 보여줍니다. 과거 태양과 같은 존재로서 민주당, 달의 존재로서 공화당으로 비유되던 것이 68년도부터 역전되기 시작해서 미국판 박근혜라고 할 수 있는 닉슨이 선거에 탁월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닉슨은 자신의 극우적 이미지를 합리적 보수이미지로 바꿨고 복지에 대한 담론을 선취합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께서 김종인 전 총리를 불러오고, 위스콘신 학파 동원을 통해서 규제자본주의를 통한 복지시대 담론을 퍼뜨렸을 때 패배를 예감했습니다. 제가 2001년부터 박근혜시대가 온다고 이야기했을 때 여러 비판을 받았지만 박근혜시대는 결국 왔습니다. 박근혜와 닉슨은 무시할 수 없는 뛰어난 사람입니다. 닉슨이라는 사람은 집권해서 민주당보다 더 나아간 복지를 시도했습니다. 진보의 상징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가 죽기 전에 고백을 하는데 닉슨이 미워서 의료보험개혁에 대해 지지를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오바마가 주장하는 의료보험개혁은 원래 공화당에서 내놓았던 안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박근혜가 닉슨의 2/3만 할 수 있다면 다음 대선에서 야권은 집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당시 선거캠패인 역시 이번 한국선거와 매우 유사했습니다. 문재인 후보께서 훌륭하신 분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재인 후보를 사람들이 노무현 2.0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건 문재인 후보의 한계이도 하고 민주당의 한계이기도 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야권의 한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봉화에 내려가셔서 가장 고민했던 것이 민주주의 사이트 2.0 이었습니다. 아마 민주주의 사이트 2.0과 청와대 국정운영시스템인 이지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노 전 대통령께서 살아계셨다면 노무현 2.0에 대한 많은 고민이 진척됐을지 모르겠습니다. 노무현 2.0이 되지 못했던 문재인 후보는 68년 닉슨과 붙었던 주류 후보 중 하나였던 험프리와 오버랩됩니다. 험프리라는 사람은 노동이라는 화두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진보적인 모습이었지만 이 사람의 한계는 존슨정부의 부통령이었다는 것과 그와 밀약을 맺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존슨은 사람을 개별로 만나서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탁월한 모사가였고, 미국의회정치 역사상 가장 탁월하게 의회정치를 구사했던 사람이고 이러한 사람은 앞으로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존슨은 험프리에게 대통령 후보로 비토하지 않는 대신 전쟁을 반대하지 말아달라는 거래를 요구하고 서로 밀약을 맺게 되면서 스탠스가 꼬이게 됩니다. 또 안철수 후보와 매우 닮아있었던 사람이 유진 메카시라는 중도적 진보 후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특기는 사람들이 캠폐인에서 분노와 열정이 달아오르려고 할 때 앞서서 캠폐인의 열기를 진화시키는 것으로서 백년서생 스타일이었습니다. 결국 68년 선거는 야권 후보들의 한계, 닉슨의 중산층에 기반한 캠폐인, 복지담론 장악 등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당시 험프리가 지명이 될 때 밀실해서 담합으로 결정되었는데 신좌파들이 이에 분노하고 시카고 전당대회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맥거번 프레이져 커미션’이라는 정당개혁을 시작합니다. 현재 민주당의 정치혁신위원회에서 정해구 교수님이 하시고 있는 역할처럼 맥거번이 정치혁신위원장을 맡게 되는데 그로 인해 신좌파 세력에 당내 영향력을 부여하게 됩니다. 68년에 서민의 정당의 이미지를 잃어가는 와중에 신좌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70년대에는 완전히 참패하게 되고 닉슨은 재선에서도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민주당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과 다른 점이 있는데 우리는 어마어마한 위기가 있어야 변화와 혁신이 일어나는데 미국은 이 정도의 충격에도 어마어마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대전환의 선거를 겪지 않고도 새로운 정치세력이 욱일승천하면서 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한국과의 차이입니다. 제가 4~5년 전부터 민주당 강연에서 위기라는 이야기를 계속 해왔는데 2년 전에 민주당 관계자들이 저에게 제발 위기라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여전히 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2등 브랜드가 1등 브랜드를 어떻게 이기는지 아십니까? 애플이 마이크로소프트를 이기는 방법, 바로 혁명적 수준으로 자신을 바꿀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제발 이렇게 까지 바꾸지 마세요.” 라고 말릴 정도가 되면 2등 브랜드가 1등 브랜드를 잡아먹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그렇게 바꿨고 박근혜 대통령이 천막당사에서 그렇게 바꿨습니다. 이에 대한 흔히 드는 예가 있는데요. 미국의 2등 브랜드가 CEO가 자기네 회사를 폭파하고 잔해로 들어가는 광고를 방영하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경영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일상적인 정치과정 속에서도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는 나라, 그 이유는 우리 보다 훨씬 긴 호흡 속에서 문제를 보고 실사구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당파성 이념이 아닌 데이터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선구자들이 엘 고어, 클린턴, 부루스 리드 등 입니다. 처음에 한국에서 이들은 진보의 이념을 버렸다며 비난을 받습니다. 물론 미국의 자본의 힘에 영합한 면이 있지만 어떻게든지 미국이 우경화되어 가는 추세속에서 진보로서 적응해가려고 하는 노력들은 어느 정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장이 가지는 역동성이 있는데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들에게는 명과 암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무브온 이야기를 할 때 전제를 둔 것이 있었는데 ‘무브온의 출발은 초당적이다.’ 라는 것이고 당파적 이념적 운동으로 가면 실패한다는 것이지요. 이때 이 미국의 새로운 선구자들은 당의 외부 운동가가 아닌 의원중심의 정당을 고민합니다. 물론 명암이 존재하는데 유럽적 정당이 가진 진보의 힘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원중심의 정당을 고민하면서 슈퍼대의원제를 통해서 외부 운동가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시작합니다. 주지사, 전직 대통령, 전직 부통령 등과 같은 사람들로 당의 당연직 대의원들을 확대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당의 외부세력인 신좌파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80년에 레인건에게 패배하고 84년에 또 패배합니다. 거의 불임정당의 시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제시 젝슨이라는 마틴루터킹과 함께 활동했던 한국의 김근태 의원님과 같은 존경할만한 운동가가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전통적인 진보세력은 불임정당화속에서 새로운 진보를 추구하는 세력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들은 DLC를 Democratic for Leisure Class(유한계급의 정당)이라고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이 진영 돈이 많고 친자본적이고 남부의 인종주의적 성향이 있고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인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많이 받았지만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민주당을 중산층들의 건전한 상식에 기초한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 점에서 한국에도 시사점이 있는데, 스탠리 그랜버그라고 하는 미국의 걸출한 여론조사가는 백인노동자층의 정서를 알아보기 위해서 미시간주의 매콤 카운티를 샘플로 집중적으로 조사를 합니다. 여기서 나온 보고서를 보게 되면 미국 민주당이 왜 불임정당이 되었는지에 대한 모든 답이 나옵니다. 아마 이 보고서를 보게 되면 이번 선거에서의 패배에 대한 많은 시사점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유권자들의 표시인 레이건 민주당, 민주당은 민주당인데 레이건을 좋아하는 민주당이라는 유명한 표현이 스탠리 그린버그의 조사에 나옵니다. 아마 이번 선거에서도 50, 60대 층에서 이런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대목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근혜 같은 경우가 대중적 보수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박근혜 후보가 왜 선거의 신이냐면 박근혜가 지나가면 그 지역에 지지율이 출렁거립니다.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쓰고 눈물을 흘리며 박근혜 연설을 듣습니다. 이것은 문화적 현상이고 심리적 현상입니다. 미국의 레이건 데모크렛 같은 경우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88년도에 민주당은 또 패배합니다. 엘 고어라는 탁월한 정책가로서의 후보가 있었는데 인터넷 발명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러브스토리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 조롱거리가 되고 대통령이 되지 못합니다. 잘난체하는 liberal 엘리트로서 서민적 감각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시 젝슨이라는 진보운동가에게 패배하는데 만약 그 당시 뉴미디어, 소셜미디어가 있었다면 상황이 다를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미국 전역에 각 주마다 DCL라는 새로운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의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고 알칸소라는 시골 주지사이지만 굉장히 신선한 시각과 대중적 카리스마와 정치에 대한 강렬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던 클린턴을 찾아갑니다. 클린턴의 권력의지는 대단했습니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김영삼 전 대통령 수준입니다. 클린턴은 자신의 대학시절 때 내각구성까지 완료했을 정도로 권력의지가 강했습니다. 밤마다 집에 오면 자신이 오늘 만났던 사람들의 데이터베이스까지 정리했습니다. 클린턴은 어쩌면 나폴레옹과 비견할만합니다. 나폴레옹이 10년 전 방문했던 항구의 조수간만의 차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일화들이 있는데 클린턴은 걸어 다니는 정치 사전이었습니다. 78년 알칸소의 선거결과가 민주당이 몇 프로를 얻었고, 72년에는 몇 프로, 쭉 얘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권력의욕이 없는 사람이 정치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몰락하는 길입니다. 클린턴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봤고, 가정폭력 속에서 살았고, 그래서 서민의 대통령이 정말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집권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30년 동안 생각했다면 TV토론회에 나와서 준비한 자료가 없다고 헤맬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클린턴과의 결합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엘 고어, 클린턴, 힐러리는 이념적 성향을 떠나서 이런 사람들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불세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 전통적 liberal 집단 중에서 제시 젝슨이 훌륭하지만 낡은 것 아닌가하는 불안해하는 사람들, 비유하자면 문재인 후보의 정책과 살아온 역사는 안철수 후보와 비교할 수 없지만 안철수 후보가 이야기 하는 네트워크, 새로운 대기업에 대한 마인드가 어필 하는 것에 끌렸던 사람들, 미국도 그런 사람들이 결합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국적 망을 만들고 싱크탱크를 만들어 냅니다. 한국 민주당의 민주정책연구원은 아무리 뛰어난 분이 원장을 한다 하더라도 정치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계를 가집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선거결과와 상관없이 10년 후를 보면서 연구원을 운영하라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뿐더러 이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DLC라는 곳에서 했던 싱크탱크는 당으로부터 독립이 되어 있고 충분한 펀드에 기반이 되어 있었습니다. 박원순 시장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은 저도 알지만 한 가지 정말 배워야 할 것은 예외적인 서구적 리더라는 것입니다. 박원순 시장이 수년전부터 했던 “프롤레타리아적인 금욕과 윤리의식을 가지고 살아야하는가, 우리도 미국처럼 돈 많이 주고 젊은 세대들이 자긍심을 가지며 일하면 안 되는가” 라는 이야기는 과거 민주화운동의 패러다임에서 시작한 새로운 시도들의 실패에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경제에서 김광수 연구소 같은 경우에 성공한 케이스지만 정치에서는 성공한 케이스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희 같은 진보교수 쪽에도 후속 세대들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후속 세대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당과 혁신과통합이 통합할 때 제가 강조했던 것이 연수원부터 세계적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연수센터를 통해서 당관료들을 포함해서 모두 평가하며 구글시스템에 기반에서 혁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개개인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현재 정당의 구조와 방식이 그렇습니다. 미국이 1000억을 동원할 수 있다면 우리는 100억도 동원하기 힘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0억으로도 충분한 가능성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긴 호흡 속에서 민주정책연구원나 싱크탱크 같은 곳들이 어마어마한 기반의 미국의 경험을 불가능한 꿈이라고 여길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DLC에 나온 저널들을 보면 놀랄 정도로 탄탄합니다. 그 반면에 한국은 한꺼번에 거대한 실험을 하는 나라입니다. 예를 들면 노무현 정부가 클린턴 정부로부터 도입했던 EITC(근로자소득공제)의 실행을 들 수 있는데요. 미국은 수년의 걸친 실험과 사례연구,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또 실험하는 반복을 거쳐서 실시하게 되는데 반해 우리는 책 한두권으로 정책을 실행해 버립니다. 한국의 모든 미시사회가 일부 영역을 제외하고 다 그렇게 돌아갑니다. 지금 한국의 일부영역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미시적인 디테일의 축적의 것으로 이미 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분당에 NHN 사옥을 만든 조수영 건축가는 심지어 직원들의 양치하는 공간에 대한 결정을 세밀한 조사를 통해 결정하고 배치합니다. 지금 앞으로 야권은 길게 봐야 합니다. 다음 선거도 박원순 시장같은 후보가 있더라도 녹록하지 않습니다. 대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질 수도 있습니다. 긴호흡을 가지고 하나 하나 단단하게 만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은 어마어마한 빅프로젝트 안거드리고 미시적인 것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안희정 도지사의 경우에도 어마어마한 학습을 통해 2년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버렸습니다. 제가 운동을 하면서 누군가와의 토론에서 만큼은 너무도 자신있어했고 그래서 굉장히 오만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미국정치를 배우기 위해서 미국 시의원선거에 존 루라고 하는 후보를 돕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전국적 조직도 만드는 일을 했던 사람이었으니 가르치는 마음으로 존 루의 미디어 코디네이터를 담당했는데, 토론 15분만에 꼬리 내렸습니다. 시의원 후보 조차도 어마어마한 내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거대한 전환기에서 배워야할 핵심이 바로 DLC입니다.

물론 클린턴의 DLC는 문제가 많기 하지만, 최소한 진보가 시장을 싫어하는 진보는 아니다는 점에서 성공한 것이고, 글로벌한 것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성공한 것입니다. 애국이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접근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시조에 대한 존경과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진보와 같은 새로운 liberal 가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중산층과 건전한 상식의 기초, 실사구시, 부단하게 진보의 가치를 성찰하고 혁신과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은 클린턴에게 긍정적으로 배워야할 교훈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화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점차 친자본화 되면서 운동적 에너지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고 서민적 어필을 잃어버리게 되고 풀뿌리 운동의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오바마가 등장하게 됩니다. 클린턴시대의 어둠과 오바마의 등장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Q. 사실 민주당의 온지 1년 넘은 상태에서 놀랍고도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았는데 첫 번째가 왜 이 당은 당원교육을 하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께 여쭤봤었는데 3개월이 멀다하고 지도부가 바뀌는데 무슨 교육을 진행하겠냐는 답을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민주당원이 총 210만당원인데 그 중에 2007년부터 지금까지 3번 이상 당비를 낸 사람을 권리당원으로 인정하고 투표권을 주는 것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요. 근데 그 숫자가 18만밖에 되지 않고 매달 당비를 내는 사람은 거기에서 1/3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처럼 민주당이 매번 말을 바꾸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당원에 기반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기적으로는 힘들겠지만 리더에 의해서 이끌어져가는 당이 아닌 가치, 노선, 철학을 공유하는 진성당원들을 육성하고 그들로부터 리더가 인정받으며 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 유럽형 정당이 어렵다고 말씀 하시는 건지 여쭈고 싶습니다.

A. 당원에 기반한 정당이 안 된다고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한국은 슬프게도 유럽보다 미국에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역동적이고 유럽처럼 계급적 기반이 안정화 되어 있기 보다는 노동의 힘이 갈수록 약화되고, 엘리트들은 시민들을 이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시민들이 훨씬 뛰어난, 시민들의 광범위한 힘이 정치를 부단히 움직이는 추동력인 것. 전 세계적 추세도 시민들의 집단지성에 대한 어마어마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을 때, 당원은 충실히 기반 하되 또한 유동적으로 비당원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 한국 상황에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노조에 기반한 노동당 같은 모델이 20세기에는 타당할지 모르겠는데, 레디컬한 정당이라면 모르겠지만,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라면 조금 더 유동적인 시민들에 기반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심지어 진보정당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해적당 같을 것을 생각할 때 진보적인 정당의 모델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녹색당 같은 흐름은 주목해야 할 흐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억해 보시면 박원순 시장과 민주당의 경선이 당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모바일 만능주의정당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하구요. 당원교육도 진보의 중요한 가치가 협업, 연대아닙니까? 저희의 시대가 왔거든요. 연대의 시대가 왔습니다. 탈자본주의를 고민하는 연대에 시대가 왔는데 슬프게도 한국에서 협력을 가장 잘 교육하고 훈련하는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조선일보 우병현 이사라고 얼마 전 ‘구글을 잘 쓰는 직장인’ 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조선일보의 자회에서에 우병현 이사가 그 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1년간 구글이라는 플렛폼에 기반해서 어떻게 하면 협업을 잘 할 것인가를 테스트하고 그 결과를 일원화 했습니다. 구글, 애플이 왜 뛰어난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유는 레디컬을 자본주의에 접목했기 때문입니다. 삼성이 아직까지 애플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유는 운동권이 없어서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새로운 상상력은 코뮤니즘에서 나옵니다. 구글의 주요한 활동가들을 보면 좌파출신입니다. 구글의 플렛폼은 빅브라더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지만 협업의 이상을 지금도 혁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조선일보의 자회사가 1년에 걸쳐서 실험하는데 왜 한국의 진보라는 분들은 못하십니까? 그러면 진보의 깃발 내리셔야 합니다. 제가 진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우리가 보수보다 더 혁신적이고 더 삶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노회찬 대표가 진보정의당에 핸드폰 30개를 나눠주고 실험한다고 하실 때 ‘역시 노선배다.’ 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것이 진보의 자세입니다.

교육 훈련의 부분에서도 민주당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에 대해서 처절히 생각해야 합니다. 10년 전 박노예 시인이 자본은 초단위로 숨 가쁘게 혁신을 하는데, 우리는 자본보다 더 혁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신 그 말씀이 저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Q. 제가 요즘 SNS를 많이 하는데 지금 구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준석, 한정석 등과 같은 보수 인물들인데 그 분들의 글을 볼 때 마다 많은 고민들을 하게 됩니다. 저는 운동권 아버지로부터 이식되어 좌파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 분들의 춈스키 같은 사람들을 비판하고 시장찬양 글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고 그래서 왜 내가 이 글에 반박을 못하는지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강의에서 인물을 키워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앞으로 10년을 바라본다면 제대로 된 좌파적 싱크탱크를 구축해야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 나이 또래(20대)에서 정치에 대한 논쟁을 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지금 새누리당에서는 이준석을 내세우며 청년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버드 출신, 그것은 빈껍데기일 뿐이고 벤처사업도 이룬 것도 하나 없지만 그것이 먹히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은 청년우파모임과 같은 그룹을 통해 체계적으로 청년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저는 누구랑 토론하고 누구랑 공부해야하는 답답합니다. 여기 지식인 분들이 계신다고 한다면 청년들을 키우는 노력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민주당 총선 패배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FTA사건때에도 본질을 보려면 독소조항을 먼저 꺼냈어야 하는데 공론화 시킨 것이 광우병이었습니다. 광우병보다 더 위험한 요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낳을 수 있는 광우병 공론화를 통해서 패배를 좌초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A. 책임을 가지고 앞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Q. 저는 좀 전에 발언했던 분의 바로 이전세대에 속하는데요. 운동권 다음에 미국 민주당의 방식은 소비적인 방식, 정치를 사고 파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그런 느낌이 강한데, 그렇게 해서 가치와 의미를 생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고요. 특히 저희 세대가 느끼는 것은 갈 길을 잃은 막막함, 현실 시장에서 취업도 어렵고 가치를 추구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러한 소비적 방식의 정치가 유효한 것인지 어떠한 가치를 생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A. 저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클린턴시대가 가진 한계, 정치를 마케팅화한 측면에서는 그 지적에 동감합니다. 동시에 정치가 가지는 기본적인 전제는 시민들과 소통하고 공감해야한다는 것을 그들은 여론조사나 다양한 기법 등을 통해서 접근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에게 일정정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 한국의 정치는 상대에 대해서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취약합니다. 안철수 교수가 청춘콘서트를 하면서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도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고, 자신의 아젠다로 만들려고 했던 노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점에서 클린턴 시대를 특징짓는 한마디, ‘나는 당신의 고통에 공감합니다.(I feel your pain)’ 이라는 것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과 소통하려고 했던 본질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특징인데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 속에서 시민을 바라보려는 것이 여전히 우리 정치에서 강한 것 아닌가, 이러한 관성을 없애는 점에 있어서는 일정의 긍정성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진보의 내일을 찾아서] 진보의 성찰2 ‘영국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동학 2(고세훈) -강연 다시보기-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동학 2

-대처와 대처이후의 제3의 길-

 

고세훈 (고려대학교 공공행정학과 교수)

 

 

 

영국에서의 제3의길

 

오늘은 제3의길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제3의길이 거의 소멸된 것 아닌가 판단합니다. 토니 블레어가 1997년에 집권해서 노동당이 2010년까지 13년 동안 집권하는데 2007년 블레어정부의 재무상이었고 블레어와도 굉장히 친한 관계였던 고든 브라운이 수상이 됩니다. 그리고 3년 뒤 보수당 캐머런정부에 권력을 내주게 됩니다. 영국에서 재무상은 수석장관으로 통하기 때문에 당연히 브라운에게 정권이 넘어가야 되지만, 83년에 블레어가 하원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미국 CIA가 뒤에서 선거자금, 전략 등을 조정하고 93년에 노동당 당수로 만들고 97년 정권을 잡도록 블레어를 키운 것 아니냐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블레어가 이라크 전쟁 등 미국의 조쉬 부시를 추종하는 정책을 펴는 바람에 수상에서 물러날 때 말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하고 브라운에게 정권을 내주게 됩니다. 그리고 브라운은 정권을 잡은 뒤 당연히 블레어로 인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이미 제3의길, 소위 신노동당 전략이라는 것이 당의 많은 불신을 받게 된 상태이고 노동당내에서 제3의길과 거리를 두려고 하려 했다는 것이 제가 본 노동당의 모습이었습니다. 더구나 90년대 중반부터 일어났던 금융위기, 이 기간이 정확히 블레어, 브라운의 집권기간과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제3의길이 완전히 실패하게 된 것이죠. 과거 80년대 노동당 정치에서 우익 정치를 대변했던 로이 헤터슬레이와 같은 사람들조차 나서서 도대체 노동당 사민정치가 어떻게 된 것이냐, 제3의길이 다 망쳐놨다고 비판하며 과거 노동당을 회복하자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2007년에 브라운이 블레어를 계승하고 2010년 선거 패배이후에 노동당 당수로 선출된 사람이 랄프 밀리밴드라는 영국의 유명한 좌파 이론가의 아들인 에드워드 밀리밴드입니다. 랄프 밀리밴드에게는 데이빗 밀리밴드라는 장남이 있었는데 둘 다 노동당의 고위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때 데이빗과 에드워드 두 형제가 노동당 당수를 놓고 붙게 되는데 데이빗은 제3의길에 굉장히 밀착했던 사람이었고 에드워드는 그와 일정한 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제3의길에 비판적이었던 당분위기는 결국 동생인 에드워드를 당수로 선출했습니다. 영국은 최대 5년 동안만 한 정당이 집권 할 수 있고 5년 안에 반드시 의회를 해산해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해야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14년 15년에는 새로운 선거를 치르게 되는데 만약 에드워드 밀리밴드가 수상이 되면 제3의길과는 다른 정치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제3의길이 이미 노동당내에서 많은 불신을 받고 있고 국회의원들에게도 도외시되고 있는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제3의길을 우리가 하나의 사상이라고 본다면, 이는 1998년 토니 블레어, 엔소니 기딘스, 1999년에 토니 블레어와 독일의 슈레더 이 두 사람이 쓴 작은 판플릿같은 5000단어로 이루어진 제3의길이라는 소책자에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들에서 특별한 체계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어떤 정신이나 방향을 막연하고 모호하게 주장하는 내용들이며, 정치경제학 같은 것들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가디언의 경제에디터였던 밀 허튼이라는 사람은 이 세 권의 책을 보고 “이 책에서는 정치경제학을 발견할 수 없다. 정치경제학 없이는 진보의 사상을 대변할 수 없다.”고 평한 적이 있습니다.

제3의길 자체가 공허한 개념이라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것이 태동하고 발전하게 된 역사적 맥락을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제3의길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개괄

이 맥락을 대체로 5가지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3의길이 영국 노동당에서 차지하는 이념적 위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것이 대처리즘을 상당히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대처리즘에 대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클린턴의 민주당과의 관계입니다. 소위 클린턴의 신민주당, 뉴딜정책인데요. 제3의길에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인 welfare to work, 복지에서 노동으로-일하는 복지라고 번역되는 이것이 클린턴의 workfare(근로복지)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네 번째는 블레어가 제3의길을 주창하기 전에 당내 정책결정과정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바꾼 당내 정치과정을 보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이것이 공허하고 모호한 만큼 상당한 정도로 선거승리를 위한 생존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90년에 대처가 퇴진합니다. 1979년에 집권을 해서 83년, 87년 이렇게 대처가 3차례 총선 승리를 이끄는데, 11년 동안 집권하고 퇴진한 후에 대처의 후계자인 존 메이져가 92년 총선승리로 97년까지 집권을 하게 돼 보수당이 18년 동안 집권을 하게 된 것이고 노동당은 연속해서 4차례 총선에서 패배를 하게 된 것입니다. 83년 총선 패배 이후로 등장한 우파 수정주의적 노선인 닐 키놉 이라는 당수가 92년 총선패배로 물러나게 되고 존 스미스라는 사람이 92년 노동당 당수가 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사람이 계속 노동당 당수였다면 노동당 정치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급진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영국의 여러 단체들을 규합해서 노동당을 만들었던, 영국 윤리적 사회주의의 근대적 창시자였던 케어 하디를 계승할만한 사람이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판단하는데, 이 사람이 병으로 2년 만에 죽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94년에 토니 블레어가 당수로 선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3의길을 위한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를 위해 당의 정책과정의 틀을 바꾸게 됩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바로 당내에서 노조의 지분, 정책결정과정에서 노조의 영향력을 급속도로 위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클린턴의 민주당이 1992년에 집권을 하게 됩니다. 80년~88년까지 레이건, 92년까지 시니어 부시가 집권하고 92년에 민주당이 들어서는데, 클리턴 민주당이 자신들을 신민주당이라고 부르고 블레어의 노동당은 자신들을 신노동당으로 부르는 등 클린턴의 민주당과 블레어의 노동당이 굉장히 빈번한 교류들을 합니다. 블레어의 노동당은 클린턴 민주당의 선거전략, 정책들을 학습하고 95년에 전격적으로 노동당이 1918년부터 가지고 왔던, 사회주의 목표를 당의 목표로 내세웠던 유명한 당헌 조항4를 전격적으로 폐지합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이를 폐지하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했었는데 블레어가 폐지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념으로서의 제3의길

이념적으로 제3의길이 노동당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볼 필요가 있는데요. 엔서니 기든스와 토니 블레어에 의하면 구좌파와 신우익간의 타협으로 제시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신우익은 말하자면 대처주의를 말하는 것이고, 구좌파는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에틀리 정부에 의해 일련의 국유화, 복지정책의 도입이 실시하는데 50년대에 들어서면 노동당 내에서 복지국가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보고 기존의 성과들을 유지하는, 즉 생산은 시장에 맡기고 국가는 분배의 문제에만 개입하는 형태로 사회주의의 목표를 실제적으로 잃게 됩니다. 이때부터 생산의 문제와 분배의 문제가 절연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는데요. 즉, 전통적인 사회주의와 완전히 선을 긋는 형태를 띠게 되는 것입니다. 50년대 노동당내에서 이런 문제를 둘러싼 논쟁들이 전개되게 되는데 이것을 수정주의 논쟁이라고 부릅니다. 자본주의가 이제는 변했기 때문에 구태어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공소유를 취하지 않아도 그것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산은 시장을 맡기고 국가는 조세와 지출을 통한 총수요관리를 통해서 분배 혹은 재분배를 위한 개입에만 치중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입니다. 이것이 노동당 수정주의자들의 입장이었던 것이고, 이것이 노동당의 주류노선이 됩니다.

1956년도에 나온 정치인이면서 뛰어난 학자인 앤서니 크로스랜드가 쓴 ‘the future of socialism’ 를 보면 2차 대전 이후 영국노동당의 대표적 정책기조였던 수정주의에 대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멀리 있는 신화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이고, 생산과 분배의 개념이 절연되고, 생산은 시장에 맡기되 국가는 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혼합경제사상이 부상한 것입니다. 사실상 이때부터 국유화문제는 거의 죽은 이슈가 됩니다. 조항 4는 분명히 국유화를 당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명시하고 있지만, 정책적으로는 거의 활용하지 않는 모습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수정주의의 입장이 토니 플레어가 공격한 구좌파입니다. 구좌파는 이미 수정된 좌파인 것이지요. 물론 수정된 좌파의 입장이 노동당 정부의 실천에서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보기 어렵니다. 60년대 말 헤럴드 윌슨 정부 때 파운드 위기, 무역수지 적자 등의 문제로 인해 반노조정책을 펼치면서 노조진영을 이반시키고 상당한 정도로 케인즈주의와 코포라티즘의 관행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고, 1976년 캘러한 정부때 IMF구제금융을 서방세계에서는 처음으로 받게 되면서 케인즈주의를 공식적으로 포기합니다. 수정주의조차 노동당이 정책실천에 있어서는 충실히 수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80년대 초가 되면 76, 79년 캘러한 정부가 노동당의 노조진영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당내 좌파가 노조진영을 과격화시키면서 지도부가 더 이상 배반하지 못하게 당의 정책결정과정을 민주화시켜버립니다. 이후 노동당은 이념을 집권을 통해서 실현하기 보다는 선거기구로 전락하는 포괄정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고 80년대 후반에 오면 미디어 활용을 통한 여론정치가 일상적인 당정치의 요체로 부각하게 됩니다. 물론이지만 여론정치가 부각되면 여론의 추이, 단기적인 추이가 정당의 최대관심이 되면서 정당의 중장기적 정책전망을 세우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추세가 80년대 말 블레어가 당수로 되기도 전에 이미 지속되었고, 따라서 90년대 초가 되면 노동당 정치에서는 국유화, 복지국가, 케인즈주의, 핵무기를 영국이 일방적으로 핵해제를 해야한다는 일방주의, 유럽이 자본주의적 세계라는 입장에서 반유럽주의, 노조주의 등이 사실상 당의 공식적인 문건에서 사라집니다. 그래서 블레어가 ‘제3의길이 구좌파와 신우익 간의 타협으로 나온 것이다.’ 라는 것이 굉장히 정치적인 수사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블레어가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대처주의가 아니라 당내 구좌파였습니다. 이미 구좌파는 피폐된 상태였는데, 이미 무력화된 허수아비를 거대한 실체로 만들어서 공격한 셈이 됩니다. 그래서 블레어의 제3의길을 우리가 통상 신수정주의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제3의길의 당내 이념화사에서 본 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처주의

두 번째 태동배경에는 대처주의가 있습니다. 대처이후의 영국정치는 대처주의가 만든 정치 경제적 지형위에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영향력이 막중하기 때문에 대처주의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대처는 전통적인 영국 보수주의에서 외부자였습니다. 옥스퍼드를 나오긴 했지만 식료품상의 딸이었고 공립인문학교 출신입니다. 이것은 영국 보수당의 당수들, 수상들의 사회경제적 배경과는 완전히 상이한 모습니다. 보수당의 당수는 1965년까지 선출된 것이 아닙니다. 매직서클이라고 해서 보수당의 원로당수들이 모여 출현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나온 보수당의 당수들은 전통적인 사립학교 출신, 옥스포트-캠브릿지 출신, 귀족이거나 대상공인 출신으로 그 사회경제적 배경이 일치했습니다. 1963~4년 보수당의 더글라스 흄이 노동당의 헤럴드 윌슨에게 패하고 물러나가 되면서 1965년에 당수를 선출하는 방식을 바꾸게 됩니다. 말하자면 의회보수당, 보수당 의원들이 당수를 선출하게 되면서 보수당의 권력과정이 민주화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당수가 된 사람이 에드워드 히드라는 사람입니다. 히드는 목수의 아들이었고 옥스퍼드출신이지만 공립학교 출신입니다. 히드 이후 대처, 대처 이후의 메이져는 고교중퇴자에 곡예곡마단 단장의 아들이었을 정도로 이때부터 당수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선출된 당수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의 변화는 굉장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제 가문에 기대기보다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보수당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면서 전통적인 온정주의적 보수주의가 아닌 시장자유주의적 보수주의를 실험하기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히드가 1965년에 당수가 되면서 당 정책을 온정주의에서 시장자유주의로 전격적으로 이동시킵니다. 1970년에 셀스톤 파크에서 보수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거기서 했던 히드의 셀스톤 연설이 굉장히 유명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후의 영국 보수주의 정치에 획을 긋는 연설로서 영국 보수당 정치가 전통적인 온정주의에서 시장자유주의로의 회기를 전면적으로 선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후 합의를 파괴한 최초의 보수당수가 바로 에드워드 히드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까지 20년 넘게 지속된 합의정치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어 당내의 반발, 당 외부의 노조운동, 특히 광부노조의 저항으로 인해 히드가 다시 케인즈주의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래서 히드가 물러나고 대처가 당수가 됐을 때 했던 첫마디가 “Ladies is not for turning”이었습니다. 히드는 남자로서 굴복해서 케인즈주의로 다시 선회했지만, 여인은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보수당은 히드가 케인즈주의로 다시 선회를 하고 광부파업이 영국전역을 휩쓰는 가운데, ‘누가 영국을 다스리는가’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에 임하지만 2차례 노동당 윌슨에게 패합니다. 그러고 나서 1975년 보수당의 당내 정책결정에 현직 당수, 수상이라 할지라도 당내 보수당원들이 원하지 않으면 불러날 수 있다는 규정이 생겨나 또 한번 민주화되면서 1975년에 히드가 보수당 당수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새롭게 만들어진 규정에 따라서 애드워드 히드가 현직 당수로는 처음으로 불명예스럽게 당수직을 내놓게 되고 이 과정에서 당수로 선출된 것이 마가렛 대처입니다. 이 새롭게 바뀐 규정은 대처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90년이 되면 마가렛 대처는 현직 수상으로는 최초로 선거, 개인적인 사정이 아닌 당내 반발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게 됩니다.

대처는 70년에 윌슨정부, 74년 히드정부, 79년 캘러한정부의 패배가 노조운동의 반발로 이루어진 사실을 지켜봐온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79년 대처정부가 들어서면서 반노조정책에 굉장히 헌신적으로 임합니다. 노조에 대해서 상당한 적대감을 가진 것이지요. 대처정치를 얘기할 때 합의의 정치가 아닌 소신정치, 신념의 정치로 얘기하는데, 대처가 수상이 되면서 얘기했던 것이 “우리도 그들처럼 이데올로기를 가져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수주의도 이데올로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인데, 보수주의라는 것이 18세기말, 19세기 초 보수주의의 이론적 태두라고 하는 버크가 “지금 여기의 정치” 이야기한 것처럼 현실주의적, 실용주의적이었고 추상적인 도그마, 원리 등을 혐오했습니다. 대처는 소신의 정치, 신념의 정치를 펼치면서 이데올로기를 가져야 된다는 선언을 통해 히드가 실패했던 전통적 보수주의로부터 이탈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대처리즘에 대해서 5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통화주의, 민영화, 반노조, 반복지,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적 우익 정치가 마지막으로 실천하는 것이 법과 질서의 정치인데 말하자면 수많은 사회경제적 약자를 양산하기 때문에 그것을 법과 질서로 통제하겠다는 것입니다.

대처는 통화주의에 대해서 병적으로 집착했습니다. 예전에는 합의하에서 완전고용이 주된 정책 목표였는데, 대처정부 하에서는 고용, 실업 이런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되지 않으며 주된 목표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것이 됩니다. 통화안정, 즉 통화공급을 통제하는 것으로서 통화량 증가의 상한선을 결정하고 이를 위해 공공예산을 억제하고 균형예산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말이 균형예산이지 이것은 공공지출을 삭감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는 긴축입니다. 이렇게 통화주의에 병적으로 집착했기 때문에 케인즈이론의 좌파인 칼 도우라는 사람은 “1979년 5월에 그녀가 권좌에 올랐을 때 그녀의 정부는 거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할 때 취했던 것과 같은 엄숙함을 가지고 통화주의적 신조를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보수당 내 전통적 보수주의자이고 대처가 중용하다가 나중에는 제외시켰던 정치인이자 학자였던 이안 길모어라는 사람은 “불행이도 대처의 통화주의는 맑스주의와 마찬가지로 한 이론으로서 죽음 보다 비참한 운명, 즉 그것이 실천에 옮겨졌다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감세를 진행합니다. 대처가 들어서기 전에 영국의 노동당 정부 하에서 최고 한계세율이 83%였는데 대처정부 하에서 그것이 40%로 낮춰지게 됩니다. 고이자에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이것이 투자에 영향을 미쳐 고환율이 되고 그래서 대처정부시절에 수출산업과 제조업이 몰락했다고 평가됩니다.

민영화와 관련하여 11년동안 대처효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65만 종업원에 17개 거대산업이 민영화 됩니다. 반노조와 관련해서는 9개에 걸친 반노조 입법을 실시합니다. 대처 재임 시 이미 영국은 서구세계에서 노조의 권력자원을 포함한 모든 집회에서 노조운동이 가장 취약한 나라로 몰락합니다. 그때 삼자개입이 법적으로 금지됐고, 공장폐쇄가 폐지되고, 지도부가 결정했던 파업은 조합원들의 비밀투표를 통해 80%이상 찬성해야 파업에 나설 수 있게 되었고, 파업중에도 조합원들은 얼마든지 단체행동에서 이탈할 수 있게 됐고, 1906년 이후에 영국에서 사라졌던 테프베일판결의 내용, 다시말하면 파업으로 인해 금전적 손실에 대해 사용자가 재소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하게 되었으며, 사용자가 노조-단체협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됩니다.

‘복지국가는 사회주의다.’ 라는 정의할 만큼 반복지주의적 정책이 팽배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지의 총량적 지출수준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지지출의 증가율이 줄어들었지만 총량지출은 꾸준히 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복지국가를 이야기할 때 복지국가의 정치적 불가역성을 표현하는데 복지가 중산층까지 포괄하게 되면서 쉽게 삭감할 수 없는 모습을 띠게 된다는 것이며, 서구국가들의 정부사이즈가 우리와 비교도 안될 만큼 크기 때문에 복지공여를 위한 관료체계가 비대해져 있으므로 복지국가가 쉽게 후퇴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지속적으로 복지의 필요성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대처가 복지 총량을 통제하는데 성공했다기보다는 복지국가의 관한 정신,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복지를 허용하면서도 굉장히 수치스럽게 만드는 가계조사 강화 등에 초점을 맞추어 복지국가에 대한 정신을 변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공격적인 신자유주의가 추진되면 사회경제적 약자의 고통이 늘어나고 범죄율이 늘어나기 때문에 법과 질서의 정치라는 이름으로 공권력이 개입되고 작지만 강한 정부라는 포장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박근혜정부의 내각 각료들의 임명들을 보면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법과 질서의 정치를 매우 강력하게 펼 것으로 보여 집니다. 대처가 이러한 내용의 정책을 펴는데 있어 엄청난 당내 반발의 비용을 치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79년에 이어 83년, 87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많은 행운들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83년 총선의 경우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이 훨씬 앞서 있었으나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대처 집권 시에 북해 석유가 터져 나오게 되면서 1천억 파운드, 우리나라 돈으로 200조원의 재정 수익을 대처가 활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방대한 국유산업의 매각으로 100조에 달하는 재정수익을 또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역사상 어느 정부도 대처정부처럼 북해 석유와 민영화라는 황금거위를 가진 적이 없었다.’ 라고 평가합니다. 거기에 더해서 대처가 강력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노동당이 이념논쟁 등으로 내분에 휩싸입니다. 이러한 몇 가지 유리한 요인들이 대처주의가 갖는 과격성과 당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처가 지속적으로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대처의 정권을 선출된 독재라고 표현되는데 이것 또한 박근혜정부를 연상시키게 됩니다. 정책과정을 거의 공개하지 않고 공식적인 정책과정을 중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각의 각료회의까지 중시하지 않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측근들을 중심으로 비공식적 정치를 해나갑니다. 각료회의가 시작되면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도록 언제나 자기입장을 이야기하고 시작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처음부터 무수한 개각이 이루어지는데, 대처중반기가 넘어서면 처음 내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결국 대처가 물러난 것도 대처주의에 충실한 추종자였던 사람들을 포함한 각료들의 반발이었습니다. 대처는 특히 당을 우리 편, 다른 편으로 가르는데, 각료들이 보고서를 올렸을 때 맘에 들지 않으면 빈 공간에 wet라고 적습니다. ‘믿을 수 없는 놈이다.’ 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처시대에 보수당 내 진영을 wet VS dry 라고 이야기 합니다. dry는 대처를 전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을 의미할 것이고요. 중요한 것은 대처주의의 정책적 내용이 블레어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대처가 전후의 합의 정치에서 전격적으로 이탈해서 정치경제적 논의의 지평자체를 이전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했던 입법적 조치들인 민영화, 반노조입법, 복지개혁 등을 블레어가 대부분 수용합니다. 예컨대 노동운동에서 1979년에 TUC의 109개 노조가 가입했었고 1,200만 노조원, 노조조직률 50%, 단체협상적용률 75%에 달하는데 대처가 끝나면서부터 블레어에 와서도 변하지 않는 통계가 무엇이냐면 2005년 통계로 TUC의 가입노조원수가 1,200만에서 600만정도로 반수가 줄었고, 조직률이 50%에서 28%로 줄었고, 단체협상적용률 75%에서 35%로 반 이상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처주의가 만든 영국정치의 지형입니다.

블레어의 노동당과 클린턴의 민주당

블레어의 제3의길을 얘기할 때 반드시 얘기해야하는 것은 클린턴의 신민주당과의 관계입니다. 블레어는 영국 노동당의 모습을 유럽 사민주의에서 모방하려하지 않고 대서양 건너 미국정치에서 그 대안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비극인데 미국은 최대의 아동빈곤국이고 복지국가로 분리 되지도 않는 나라입니다. 80년대 레이건, 대처가 대서양 양안에 신자유주의의 담론과 정치를 주도했는데, 대처의 가장 확실한 유산이 노동당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라면 레이건의 확실한 유산은 민주당을 변화시킨 것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어쨌듯 영국 노동당이 미국의 민주당을 모델링했다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인데 미국의 민주당은 소위 사민주의라고 이름 붙일만한 정책을 펼쳐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1992년에 클린턴이 등장하는데 12년 동안 공화당에게 정권을 내줬으므로 이때가 되면 민주당의 선거패배에 대해 여러 가지 요인 분석을 하게 됩니다. 민주당이 72년에 닉슨과 맥가번의 대결에서 맥가번이 형편없이 패하고 84년 선거에서도 레이건과 월터 먼데일의 대결에서 패하고 88년에 조지 부시 시니어와 마이클 두카키스의 대결에서 패하는데 이때 당시 실패한 후보들은 모두 자유주의(유럽으로 치자면 사민주의적인)적인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민주당이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가 너무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이었기 때문이라는 당낸 자성의 목소리가 많아지게 됩니다. 클린턴은 상당히 우익적인 사람입니다. 예컨대 85년에 먼데일이 레이건에게 패하고 나서 민주당의 보수정치인들이 데모크라틱 리더쉽 카운실(DLC)라는 것을 조직합니다. 이 조직은 선거패배의 원인을 급진적 정책에서 찾고 따라서 이는 결국 부자와 백인의 호의를 얻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지속적으로 가난한 사람과 흑인들로부터 거리두기를 전략을 펼칩니다. 클린턴은 DLC 창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주당은 사실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라든가 존슨시절의 시민권 혁명과 같은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정당입니다. 하지만 클린턴은 이런 것으로부터 전면적으로 거리두기를 하게 되는데 이는 의료개혁, AFDC-1935년에 루즈벨트의 사회보장법에서 시작한 것으로 아이를 가진 편모를 대상으로 한 사회권으로서의 사회부조였지만 클린턴이 수혜기간 5년설정(연속 2년 이상 금지), 책임을 연방에서 주정부로, 수혜자는 공원청소와 같은 공공근로를 의무적으로 수행해야하는 형태로 개혁–의 사실상 폐지 등이 보여줍니다. 이러한 클린턴 정부에서 만들어낸 근로복지 개념이 영국 노동당 제3의길의 핵심인 일하는 복지에 차용된 것입니다. 96년에 이러한 새 법안에 클린턴이 서명을 하면서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제 미국에서는 우리가 알아왔던 대로의 복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민주당의 정책이 노동당의 welfare to work에 반영된 것입니다. 대처랑 클린턴을 볼 때 가장 신기했던 것은 무엇이냐면 복지를 자본주의 구조, 경제적 문제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빈곤의 문화담론 같은 것이 융성하게 되면서 의존문화에 대한 질타를 공개적으로 하고 under class-계급 밖의 계급, 복지 의존자, 없어져야할 계급-로 낙인 시키고, 공동체주의-공동체 붕괴의 원인을 복지 의존자들에게 묻는-의 해체원인으로 몰아넣는 등 행위들을 통해 비난의 정치, 책임전가의 정치라는 여러 오명들을 얻게 되기도 했습니다. 복지의 문제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시장질서가 낳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소하기 보다는 문화의 문제로 보고 그 책임을 전적으로 복지수혜자에게 돌린 것입니다. 블레어는 절대적인 클린턴주의자였습니다. 1992년에 영국이 총선에서 4번째로 패하고 클린턴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 이후에 블레어와 골든 브라운이 굉장히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합니다. 때로는 클린턴을 만나러, 때로는 클린턴 주변 인사를 만나러, 때로는 기업가들을 만나러 부지런히 방문합니다. 97년에 블레어가 총선에서 승리하는데 그 전인 96년에는 블레어가 국가손님으로 공식 초대를 받고 미국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두 지도자가 굉장히 친밀한 사적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이에 대해 영국의 중도좌파 신문이 가디언은 “두 사람은 마치 태어날 때 분리된 쌍둥이처럼 대화를 나눴다.” 라는 촌평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노동당과 민주당이 모두 일련의 선거 패배를 경험했으므로 블레어로서는 민주당 클린턴의 승리에 작동했던 전략을 교환하고 학습하고 정책으로서는 복지, 범죄에 관해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등 중간 계급의 지지를 유발하여 선거승리를 야기하기 위한 노력들을 한 것입니다.

1994년 7월에 블레어가 노동당수의 선거운동을 할 때 복지의존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하고 workfare를 공식적으로 주창합니다. 일과 복지는 함께 간다는 것이고 고용이 최상의 복지라는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상당히 공격적이고 반복지적인 함의를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과 함께 이듬해 95년 특별당대회에서 조항4를 폐기합니다. 97년 집권 후에는 바로 재무상이었던 골든 브라운이 미국을 방문해서 미국의 알렌 그윈스킨 FRB의장을 만나 굉장히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는데 뱅크 오브 잉글랜드를 독립시키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한 나라의 통화정책에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중앙은행에는 어디에나 보수적인 금융론자, 즉 통화주의자들이 집결해있습니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자율를 높이거나 낮추지 않을 수 있을까, 통화량을 통제해서 자국의 화폐가치를 유지할까’입니다. 헌데 이는 복지국가의 기본정신과 어긋날 뿐만 아니라 좌파정권이라면 한 나라의 재정정책뿐만 아니라 금융정책 자체를 주도해야하는데 영국에서 마침내 블레어 정권이 중앙은행을 독립시켰다는 것은 정책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갖습니다. 선거 승리 이후에도 블레어와 클린턴의 관계는 지속되는데 블레어가 수상이 되자 클린턴이 즉각 방문을 하고 다시 블레어가 기딘스와 같은 지식인들을 대동하여 답방하고, 그러면서 영국과 미국의 중도좌파 정당모임 같은 것도 제안되는 등 깊은 관계가 지속됩니다.

 

노동당 당정책결정과정의 변화

노동당의 정책구조를 변화시켰다고 얘기했는데 변화의 핵심이 무엇이냐면 당정책과정을 민주화시키고 확대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80년대에 진행되다가 블레어에 의해서 확대되는데 1man 1vote 즉, 1인 1투표제를 도입합니다. 이는 지구당 같은 경우에는 80년대 말까지 사실상 당의 중간간부들, 즉 활동가들이 좌지우지 했는데 그것을 당의 일반당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형태인 것입니다. 활동가 같은 경우 이념성향이 강한데 일반당원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서 이념적 성향을 약화시키고 노조의 경우 소위 블록투표, 즉 위원장의 의견에 집단투표를 해왔었는데 이를 폐지하고 일반 당원의 목소리를 키움으로써 노조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노동당이 노조 위원장들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것을 차단하며, 당수나 부당수를 뽑을 때 선거인단을 구성하는데 여기에 노조 지분을 낮추고, 노조의 재정적 영향력을 50%이하로 낮추고 기업으로 채우면서 자신의 제3의길을 펼쳐나가는 기반을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제3의길이 노동당 하나의 당 이념, 정책으로 등장하고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노동당에서 발원해서 유럽대륙으로 퍼지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배경인 것입니다.

제3의길의 성취

블레어 시대에 와서 국유화 포기하고 누진세와 공공지출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거기에 사회주의나 사민주의라고 이야기할만한 것이 무엇이 남았느냐,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제3의길의 새로운 타협의 논거는 이렇습니다. 예산적자, 긴축이라는 것이 큰 쟁점인데, 예산적자는 감세가 아닌 복지예산이 늘어났기 때문이고 복지예산이 늘어난 원인은 복지사기꾼, underclass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실업이 증가하고 기업과 자본에 대한 감세가 만든 예산적자를 자본주의의 문제가 아닌 복지국가의 위기로 전치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래서 당의 정책목표는 적자를 감소한다는 것, 긴축하다는 것은 균형예산을 실현한다는 것이고 이는 공공예산을 삭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용증가를 하지만 과거의 총수요관리를 통해서 투자를 증가시키고 고용과 성장을 이뤄내는 맥락이 아닌 사회투자국가의 맥락, 즉 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훈련과 재교육을 통해서 노동시장으로 재진입시킴으로 고용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이는 훈련받는 기간에 상당한 정도의 소비적 복지를 국가가 부담하고 국가가 제공하는 사업장을 몇 차례이상 거부할 수 있고 직장으로 인해 이사를 해야 할 경우 이사비용을 제공하는 등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모습이 아닌 강제적으로 참여시키는 훈련을 받거나 아니면 급부를 포기하거나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소극적인 노동정책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실업자들의 복지혜택조건을 까다롭고 수치스럽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고 적성에 맞지 않더라도 국가에서 소개하는 사업장에 갈 수밖에 없고 저임금수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제3의길에 대한 평가

제3의길이 주창되면서 시장은 단순히 수용되는 곳이 아닌 환영되어야 할 곳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민주의로 여겨지는 내용들-국유화, 조세를 통한 재분배-이 포기되어 집니다. 사회투자국가 개념도 생산적 복지, 근로복지를 다루고 있는 개념이고 복지가 생산과 고용, 경쟁력과 효율을 강조하는 실체일 뿐입니다. 이런 것을 도외시할 수 없겠지만 이런 것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어느 정도의 소비적 복지를 통한 안정망, 탈상품적 요소들이 전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3의길이 무차별적으로 다른 나라에 전이되고 한국 같은 나라에서 채용하는 것의 문제가 무엇이냐면 제3의길을 수용하면서 실업과 빈곤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저임노동자에 대한 가계조사를 강화하면서 개인들을 또 저임노동으로 몰아넣은 악순환의 반복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과거의 사회보장국가가 제3의길을 통해서 사회투자국가로 변화하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선진개념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복지국가의 형성자체가 사회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의 권력자원의 비례률이 어떻게 교우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인데 이것의 균형점이 쉽게 변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이 복지국가도 아니면서 복지국가를 공격하는 이유는 복지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복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권력자원이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를 반대하는 기득권층의 목소리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복지국가가 아닌 미국,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복지국가 위기론이 가장 힘 있게 주장되는 이유는 힘의 추가 기울어져 있는 측, 반복지담론을 통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브레이스 같은 사람이 복지국가 위기론에 대해 “복지국가 위기론은 다름 아닌 부자들의 반란이다.”라고 규정하는 모습은 깊은 통찰력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제3의길과 한국

지난 일백여년의 역사를 돌아볼 때 영국 노동당이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화에는 성공했지만, 사민주의의 일반적 위상과 유럽 대륙국가들의 상대적 성취들에 비춰보면 과연 그것이 성공적인 정치화였는지 단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수권정당으로서 영국노동당의 정치적 지위가 확립된 지 거의 90년이 지난 오늘날, 특히 80년대 이후 노조조직률, 노동당에서 노조가 행사하는 제도적인 영향력과 지분, 영국 노동당의 법적 위상, 노조운동에 대한 사회적 위상 또한 지속적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대륙의 선진 복지국가들과 비교해보면 영국의 정치적 산업적 노동운동이 처한 열악한 상황은 두드러집니다. 정치제도, 정당정치의 전통, 노동운동의 역사와 정치화 시점, 노동운동 안 밖의 여건들, 사회민주주의와 민주주의 담론과 관행의 사회적 위상, 엘리트 특히 진보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들 등의 허다한 조건들의 차이로 인해 영국노동당의 경험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화 혹은 진보진영의 역사적 과제 등을 직접적으로 추출하는 것은 부질없고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단지 영국 노동당의 경험을 하나의 교사 혹은 반면교사로 삼아 조심스럽고도 진지하게 한국진보정치의 앞날을 성찰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이 수권정당으로 자리 잡기까지 구조적 역사적으로 험난한 조건들뿐 아니라 수많은 돌출적인 사건과 우연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결정적인 시기마다 그것을 포착해서 전향적으로 활용하는 즉, 이론에 기대어 역사의 흐름을 지래 예단하거나 정당을 냉소하거나 과도하게 낙관하지 않는 진보엘리트들, 지식인, 정치인들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결연한 자기희생이 있었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진보정치에 대한 희망이 여전히 당이라면 우리가 영국으로부터 배워야할 점은 그 점일지 모릅니다. 적어도 이데올로기 스팩트럼의 맥락에서 과거의 중도 혹은 합의가 그나마 수정된 좌파로 불릴 수 있다면 지금의 새로운 제3의길에 대해에서는 많이 양보해서 수정된 우파정도의 평가정도를 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적 실정을 참고 할 때 제3의길 조차 신자유주의가 그렇듯이 복지국가, 노동운동, 노동당, 케인즈주의 등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한 이후에 등장한 역사적 개념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무리 복지국가 위기론, 세계화된 담론이 융성한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축적된 제도적 유산과 그에 따른 방대한 수혜자 그룹, 그리고 한 세기 넘게 제도화된 노동운동의 틀이 일거에 무시되지 않는 한 대륙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사민주의의 재편조차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현실은 정치적 수사로 포장되기엔 너무 구체적이고 완강합니다. 이런 토양에 제3의길을 한국적 현실에 무작정 차양하는 신중을 할 수 밖에 없는 일일 것입니다. 가령 기왕에도 소비적 복지가 노동의 직접적 탈상품화 효과 이외에 총수요증가, 안정과 신뢰증진, 생산성증가, 성장과 고용의 기여 등 경쟁력과 생산을 위한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마당에 구태어 제3의길과 이를 위한 복지가 주된 내용으로 제시하는 훈련담론에 기초한 경쟁력 접근들이 한국사회에서 부상하는 것은 다소 기이한 일입니다. 그것은 첫째, 시장실패 곧 자본주의의 체제적인 문제를 희생자의 기술문제로 전가하는 문제가 있고, 둘째, 미국 등에서 고숙련 실업자가 존재하는 것을 보며 알 수 있듯이 시장의 불확실성속에서 무슨 훈련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셋째, 훈련비용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실업보호 등 전통적으로 마땅히 지불해야하는 소비적 복지 자체를 위축시킬 수 있고, 넷째, 훈련비용을 위한 재원조달 자체도 쉽지 않은 문제이며, 다섯째, 고기술과 서비스부분이 전통적 제조업으로부터의 탈락자들을 적절히 흡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된 정책과제들은 무엇보다 소비적 복지의 최소한의 구축이고 그 이후에 추가적으로 동원되어야 할 것들일 것이고, 소비적 복지의 수준이 OECD 최저수준인 한국의 형편에서 거론하기도 민망한 개념들입니다. 독일과 스웨덴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고생산성 전략은 방대한 소비적 복지, 보편적 복지 안정망 내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3의길과 관련해서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Q. 오늘 결론으로 말씀하신 것이 스웨덴이나 독일과 같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펼치는 보편적 혹은 소비적 복지국가를 지향한다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복지국가를 만들려면 권력, 집권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텐데요. 지난 시간에 선생님께서 민주당은 생각이 없는 정당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지금 노동당의 제3의길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지난주에 한국에서 무엇을 바꿔야 할까라는 고민에 제도를 바꿔야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도를 바꾸려면 법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의회권력을 가져야 할 것이고 한국의 민주당은 생각이 없는 정당이니까 새누리당 박근혜정부에게 자비를 구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고민들을 하니 허망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 한국의 정치세력들은 무엇을 해야하고 어떤 활로를 가져야할지 여쭙고 싶습니다.

A. 민주당이 진보라고 할만한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사안마다 지지가 가능하니까 어쩌면 편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한 나라의 복지수준은 힘의 싸움의 결과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 권력의 균형점이 어디있느냐가 결정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복지가 열악한 상황에 비춰보면 노동, 사회경제적 약자의 권력자원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상당히 답답한 것 같지만 한 쪽으로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약자들이 집단적으로 혹은 계급적으로 연대, 결속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의회에 낼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설사 쉽지 않은 길이라도 변함없는 목표로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사이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도가 부실할때는 인물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컨대 심상정, 노회찬 같은 사람들이 한 개인으로서 국회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것 같은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도가 부재할 때 제도를 만들기 위해 뛰어난 엘리트들이 의회에 들어가는 점도 있지만 제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제도의 역할을 대신하는 개인들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한국 진보정치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 가장 크게 실패한 점은 사람을 길러내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세력을 키워낼 수는 없어도 사람은 키워낼 수 있거든요. 저는 그것에 별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Q. 선생님께서 제3의 길에 대한 평가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비판 일변도 아닌가 생각됩니다. 비판이 균형을 잡으려면 제3의 길이라는 노선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여건까지도 보아야 되는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영국사회의 사회경제적인 환경의 변화, 예를 들면 제조업에서 서비스산업으로의 산업구조 변화, 이에 따른 노조의 영향력 감소, 세계화 등의 산업구조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노선을 시도하는 것 아닌가, 이런 현실내재적인 필연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 어쨌든 그러한 변화가 18년 만에 선거 승리를 가져왔는데 그것의 현실적인 유용성을 무시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3의길에 대한 좌파노선에 입각한 일방적 비판이 어떤 현실적인 유효성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또 하나는 블레어가 정권을 잡고 제3의길을 펼치면서 영국 노동당의 운영행태, 오퍼레이션 상의 변화, 혁신 등이 어떤 것들이 더 있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A. 제가 제3의길을 비판적으로 보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제3의길을 호의적으로 보기 때문에 비판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은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최소한 사민주의의 가치, 가치추구를 위한 권력적 수단들을 염두에 두고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노동당이 블레어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동운동의 정치화는 성공했지만 이것이 성공적인 정치화 였느냐에 대해서는 점차 회의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회의 기저층을 자꾸 이반시킨다는 측면, 그래서 권력적 수단자체가 사민주의적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고, 사회주의의 본래 정신에 비추어서 생산수단의 국유화, 공공소유도 포기하고 복지국가의 기본원리인 조세지출의 논리를 포기했다면 노동당을 사민주의 정당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80년대에 들어서면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굉장히 강화되면서 복지국가 위기론이 거론되기 시작하고, 합의의 정치가 무너진 복지국가의 위기가 주도적인 시대의 담론으로 부상하는 이 상황의 원리를 생각해보면 케인즈주의 합의의 논리가 생산과 분배를 완전히 인위적으로 절연시키면서 오로지 시장이 생산한 것을 국가가 재분배하는 것에만 만족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분배조차도 시장의 역할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민주의가 회생하려면 추상적이긴 하지만 공세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경제민주화 같은 자본의 생산과정 자체에 대한 민주화를 통한 통제와 같은 것을 곁들이지 않으면 자본의 공세에 취약하게 노출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거승리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재인후보가 대통령이 됐다면 복지국가에 관해서 정도의 문제로는 박근혜대통령보다 나은 정치를 펼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것이 질적으로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민주당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민주당을 욕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만큼 준비가 안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선거의 승리자체도 크게 평가 해야하지만 승리해서 뭘 한건데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선거패인분석을 할 때 위에서는 계급구조문제를 중요시합니다. 예컨대 산업구조, 고용구조, 교육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에 구태의연한 좌파의 이념과 가치를 내걸고 유권자들에게 표를 달라고 할 수 있는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보쪽에서는 상당한 정도로 계급구조의 문제보다는 계급형성문제를 주목합니다. 이는 계급이 객관적으로 구조화되기보다는 정치 혹은 진보세력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이 지지하지 않는 것은 계급구조의 변화 문제가 아니라 진보정치의 역할 부재로 인해 계급이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자본주의 선진국들이 계급구조, 산업구조가 다 비슷한데 왜 복지국가 수준이 다르고, 왜 계급의 결속력이 다르고, 계급의식이 다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진보는 정치의 책임을 스스로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진보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노동당 운영의 변화는 말씀드렸던 것 정도일 것 같습니다.

 

Q. 저는 사민주의와 협동조합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국가들은 사민당의 오랜 집권을 통해서 사민주의에 대한 가치의 깊이가 상당한 것으로 느껴지는데 영국의 경우 노동당이 표를 찾아가는 인기영합적 정당으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일이나 스웨덴에 대한 약간의 언급을 부탁드립니다.

A. 저의 기본입장은 자본주의의 문제가 상당히 체계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대량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막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가 전면에 나서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민주의는 국가가 중심적인 행위자 일테고, 협동조합은 지극히 부분적 역사적으로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만 역시 민간의 역할인 만큼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Q. 보통 복지국가 이야기를 할 때 스웨덴을 많이 얘기하는데요. 하지만 스웨덴과 대한민국은 역사와 사회문화적 배경이 매우 다릅니다. 일차적으로 한국은 기득권이 기득권 유지에만 욕망이 앞서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부터가 다르고 학제간-정부부처간 등의 협력 실종 즉, 서로를 상대방을 용인하고 인정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스웨덴을 이야기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A. 북유럽과 사회문제적 배경은 물론 다릅니다. 저는 문화라는 말은 모호한데 이를 변화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이를 변화시키는 가장 빠른 길은 제도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도의 핵심이 무엇이냐? 내려놓지 않으면 내려놓게 만드는 것이지요. 힘은 힘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문화로 이해할 때 기독교 문화, 노블리스 오블리제 등 복잡한데, 기본적으로 가진 자가 자발적으로 내놓은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자체가 세속화로 인해 윤리적으로 서유럽사회에 근근이 남아있는데, 그것이 사라지고 나서 사람들을 윤리적으로 공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이 있을까?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 사람을 윤리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힘밖에 없는 것이지요. 가진 사람은 결코 자발적으로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주의적 가정일 것입니다.

 

Q. 지금 새로 노동당의 당수가 된 에드워드 밀리밴드가 갖고 있는 정책, 이 정책이 보수당을 이기고 다음 총선에서 집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A. 보수당의 데이빗 캐머런 수상도 처음에 등장할 때에는 영국의 전통적 보수주의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상당히 시장자유주의적으로 기울었습니다. 이에 비해 밀리밴드는 훨씬 나은 정치를 펼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국의 제3의길이 진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3의길과 과거의 케인즈주의의 합의점에 대한 전략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현재 노동당 현역 의원들이 제3의길과 거리두기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에 밀리밴드가 정권을 잡게 되면 훨씬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영국이 그 정도 기반이 있는 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Q. 저는 아직 선거권도 없고 정당에 가입할 수 없는 미성년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진보세력이 인물을 못 키운 것이 패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돌아가신 김대중, 노무현 전대통령과 같은 인물들이 있었음을 상기하면 그것을 패착으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물보다는 한국 국민들의 정서나 감정들이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인한 레드컴플렉스로 인해 진보정당이 진보적 색깔을 내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A. 물론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진보는 말할 수 없는 어려운 여건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이야기는 인물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물마저 길러내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인물은 중요할 수도 있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방금 김대중, 노무현 전대통령을 이야기했지만, 자신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해줄만한 집단적인 세력이 없어서 였는지는 몰라도 진보라고 이름붙이기는 어려운 정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의 내일을 찾아서-진보의 성찰1]’영국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동학 1(고세훈) -강연 다시보기-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동학 1

-영국노동당의 창당에서 대처 이전까지-

 

고세훈 (고려대학교 공공행정학과 교수)

 

 

 

<홍세화 선생님 인사>

여러분 반갑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사회복지책마을과 연대해서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프랑스에 있을 때는 어쨌든 경제와 사회가 균형을 이루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는데 한국에서는 경제가 사회와 인간을 압도하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이에 대한 고민들을 이 공간 안에서 함께 공유하고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의 개요

오늘은 노동당의 창당에 초점을 맞추고 발전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개관해보려고 합니다. 다음 주에는 노동당의 이념의 변화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고 박근혜정부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으로 보이는 대처정부가 만들어낸 결과물인 제3의 길에 대해 해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논의하는 것이 진보정치에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을지도 논의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영국 노동당사에 대한 저의 해석과 시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영국에 가면 영국노동당사에 대한 연구 자료가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비교해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영국 노동당사가 흐르면서 주옥같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탄복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이 우리의 실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국의 경험을 우리나라에 바로 대비시키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고 영국 노동당 사를 살펴보면서 반면교사로 삼고 성찰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국 노동당의 개괄

영국 노동당은 노조 운동의 소동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창당 이후에 노동조합이 노동당정치에 다양하게 관여를 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노조운동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조는 방대한 인적자원과 재정적 자원을 통해 노동당을 지배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 노동당의 정치는 노동조합의 적극적인 관심, 그리고 무관심이 정해주는 한계 한에서 결정되어 왔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실제 노동조합은 노동당의 정책결정기관에 반 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국 노동당의 이념의 흐름에 사실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 운동은 경제적 산업적 이해관계가 심대하게 침해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한 일상적인 당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노조에게 정치는 사실상 부차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노조운동은 단체협상이나 파업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산업적 이해가 침해되었다고 생각될 때 노조운동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당내 소수 좌파들이 노조운동의 동원을 위해서 부산하게 움직입니다. 이들에 의해서 노조운동이 당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당내 좌파가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노조운동을 동원하고 당내 외에 지식인들을 동원하면서 당내 이념, 이론, 정책에 대한 엄청난 논쟁을 만들어내고 결국 당의 급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형태는 30년 대공황, 오일쇼크 등 위기상황에 반복되는 형태입니다.

1979년 마가렛 대처가 수상이 되는데 대처주의는 영국 정치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제3의길은 대처가 바꿔놓은 지형위에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대처정부가 들어서면서 노조운동을 박살내는데 이 이전까지는 노조운동은 노동당 정치를 결정하는 주요 형태였습니다.

노조운동이 급진화 될 때마다 이를 부추기는 세력이 당내 소수 좌파세력인데 이들은 많은 좌파 지식인, 정치인을 동원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 내외에 포진해있다가 때가 될 때마다 노동당정치에 사상, 정책 논쟁에 개입하는 지식인, 정치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노동당 사상의 큰 뿌리 중 하나가 페이비안 주의인데, 지금도 영국 노동당 정치인들 200명 이상이 페이비안협회의 회원들입니다. 대체로 영국노동당의 정치인들과 진보지식인들의 끊임없이 조사하고 탐구하고 읽고 기록하는 전통을 눈여겨 봐야합니다. 예를 들면 강의를 듣는 것보다 발제하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영국 노동당 여성 정치인의 대모 격인 바르라 카셀의 말을 빌려보면 그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정치인이 기록하지 않는 것은 범죄와 같다.” 는 말은 영국 도서관에 가득한 영국 노동당 현직에 몸담은 정치인들이 써낸 일기와 자서전, 회고록, 편지모음 등이 증거입니다. 끊임없는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노동당이 사회주의 이상에 비추어 지금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등을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제3의길도 많은 비판이 있겠지만 ‘이런 것의 소상, 지적 길항의 산물이다.’ 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의 정당체제와도 관련이 있을 텐데 미국 같은 경우는 국회의원 1인당 수십 명의 정책보좌관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가 입법기관으로서 딱히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영국은 정당정치가 중심이기 때문에 정책의 보좌기능은 정당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많은 보좌관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혼자 공부해야하고 그래서 영국정치인들은 실제 지적 탐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합니다. 지식인계가 안정되어있고 그것이 흘러넘쳐서 정치로 유입이 되는 과정은 우리나라와 상당한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진보정치가 혼란상태에 빠져있고 전망자체가 어두운 상황이지만, 가장 큰 실패는 인물을 길러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국 노동당과 비교했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 정도를 염두 하면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영국 정치의 역사 개괄

노동당은 1900년에 창당합니다. 창당할 때 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지 않는데 이것도 중요한 의미를 같습니다. 노동대표위원회로 창당합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창당했지만 정당이름에 사회주의, 당 어떤 용어도 쓰지 않습니다. 1906년에 돼서야 노동당이라는 당명을 선택하게 됩니다. 1차 대전을 거쳐 1923년에 영국 전통의 양당중 하나인 자유당을 제치고 제2당이 됩니다. 그러면서 처음 집권을 하게 됩니다. 제1당인 보수당이 만만하게 보고 소위 봐준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29년에 최초로 제1당이 되고 2차 집권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과반수 의석을 넘지는 못하는 자유당의 지지를 전제한 집권이었습니다. 노동당이 확실한 절대과반을 가지고 처음 집권한 것이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입니다. 전쟁영웅인 처질이 이끄는 보수당에 압승을 하고 영국 정치에 개혁의 빵빠레를 울립니다. 에틀리 정부가 일련의 국유화, 복지정책을 실시합니다. 50년대 보수당 시대로 가고, 60년대 6년 동안 헤럴드 윌슨이 노동당 정부를 이끌고, 70년 전반에 에드워드 히드가 보수당 정부를 이끌다가 74년부터 79년까지 윌슨과 캘러한이 번갈아가며 노동당 정부를 이끕니다. 그 와중에 아까 얘기했던 노조운동이 때로는 영국 노동당 정부와 협조하고 때로는 반발하면서 갈등관계를 지속합니다. 70년 노동당 윌슨 정부, 74년 보수당 히드 정부, 79년 캘러한 정부가 물러날 때 모두 노조운동의 반발로 물러나게 됩니다. 1979년에 불만의 겨울이라는 유명한 공공노조 파업 속에서 등장한 사람이 마가렛 대처입니다. 대처는 11년 집권하고 90년에 대처의 후계자인 존 메이져가 97년까지 집권하면서 18년 동안 보수당 지배 속에 있다가 97년에 노동당 토니 블레어가 집권하게 됩니다.

97년부터 2010년까지 노동당이 집권을 하게 되고 2010년에 선거에서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과 자유민주당 닉 클레그의 연정이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국의 진보정치는 노동당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공산당과 같은 군소 정당들도 있지만, 노동당을 비판하고 못마땅해도 결국 노동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합의가 진보정치인, 유권자들에게 암묵적으로 있다고 보입니다. 노동당이 비판을 받는 측면이 있고, 노동당과 관계했던 단체와 사람들이 많이 떠납니다. 그런데 영국 진보정치의 정치적 채널로써 노동당이 점하는 유일한 위상 때문에 결국은 노동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실험은 실패합니다. 1901년에 노동당에 창당에 깊이 관여했던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사회민주연맹이 탈당해서 사라져 버립니다. 1932년에도 창당에 관여했던 독립노동당이 노동당 지도부의 이념적인 모호함 때문에 탈당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유권자뿐만 아니라 지식인들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1981년에 노동당이 급진화 되면서 노동당 내 우파를 이끌었던 4인방이 탈당하면서 사회민주당을 만드는데 역시 실패하고 자유당과 합당해서 현재의 자유민주당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좌, 우에서 노동당을 떠났던 모든 세력들은 정치적으로 얼마가지 않아 생존하지 못했습니다. 영국정치는 결국은 정치적 실천을 위해서 기댈 곳은 노동당뿐이 없다는 것, 일반 유권자들도 영국의 진보정치는 노동당을 통해서 대변될 수밖에 없다는 합의가 암암리에 존재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노동당 창당의 배경

노동당이 창당할 때 개인이 당원으로 가입할 수 있는 제도가 없었고 단체 당원으로만 가입할 수 있었습니다. 창당할 때 페이비안소사이어티, 노동조합, 사회민주연맹(마르크스주의단체), 독립노동당 4개 단체가 노동당을 창당합니다. 그런데 독립노동당을 제외하고 3개의 단체는 창당에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노동조합의 경우 19세기 중엽 이후 차티스트 운동이 실패하고 나서 노조운동이 숙련공 중심의 운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숙련공들은 정치활동에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산업, 경제적 권리를 옹호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1860대부터 숙련공조합들은 자유당을 통해서, 소위 자-로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대변할 수 있었습니다. 19세 말에서 20세기 전반기까지 자유당이 굉장히 급진화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자유당 내부의 개혁, 급진세력을 통해 숙련공조합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산업적 이익을 정치적으로 대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태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꿰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900년 노동당 창당에 노조의 2/3는 참여하지 않았고, 거대 노조들은 다 무관심 했습니다. 지극히 일부만 노동당 창당에 관여하게 되는데 1880년부터 비숙련 노조운동이 결성되고, 신노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노조운동이 상당히 활성화되다가 1890년대 법적으로 상당한 철퇴를 맞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최종 판결을 상원에서 하는데, 이때 노조운동이 1800년대에 쌓아왔던 법적권리를 일거에 무효화시켜버립니다. 이제 노조운동에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는 기본적 권리를 누릴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됩니다. 사실 노조운동은 불가피하게 정치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조운동을 법적으로 용인하는 문제가 정치의 문제이고, 합법화 되었다 할지라도 자기의 권리를 계속 유지, 확대하기 위해서 역시 입법이 필요한 것이고, 산업과 시장의 영역이라는 것이 돈의 지배 속에 존재하므로 민주주의라는 정치 영역에서는 형식적일지라도 평등하게 자신의 이익을 대변시킬 수 있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산업적인 투쟁보다 정치적인 투쟁이 유리합니다. 기본적으로 어디에서나 노조운동은 정치화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890년대를 거치면서 노조운동이 구체적인 위기의식을 갖게 되고 당시 13% 정도의 노조 조직률 속에서 1/3 정도가 노동당 창당에 관여하게 됩니다. 노조운동은 노동당창당에 관여하긴 했지만 사회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노동운동의 수세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단체가 페이비안소사이어티인데 이 곳은 상당한 엘리트 집단입니다.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이고, 사회주의의 싱크탱크로서 노동당의 단체회원으로 있습니다. 진보적 단체로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단체이고 가장 많은 성과를 단체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팜플릿, 정책보고서, 세미나개최 등 영국노동당 정치와 사상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록 엘리트주의, 지식주의 등을 견지했지만 지금도 영국 노동당 지도부는 물론이고 150~200명의 노동당 의원들이 공식적인 페이비안소사이어티의 회원으로 있습니다. 이 조직은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이 정치화될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침투와 설득’ 이라는 조직 실천의 방법론을 바탕으로 기존의 정당들에 페이비언소사이어티 회원들이 침투하여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운동의 동반자로써 노동계급을 불신했습니다. 시드니 웹이 저술한 노동조합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노조운동은 기본적으로 단기적인 경제주의에 젖어있기 때문에 이들이 집단적인 정치적 운동체를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지버나드쇼는 “우리는 노동계급을 위해서 일하지만 노동계급과 함께 일하지는 않는다.” “혁명이 노동계급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노동계급에는 희망이 없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노동계급을 통한 대중운동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었지만 결국 창당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인드만이라는 사람의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사회민주연맹이 창당에 동참하는데요. 페이비안 소사이어티를 포함한 이러한 단체들은 모두 1880년대에 생겨났습니다. 비숙련노조가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파업파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비숙련노조원들이 교육수준도 낮고 스스로 조직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기에 사회주의단체들이 대거 개입해서 파업들을 선동하게 됩니다. 성냥공장 여공, 런던부두의 항만노동자들을 조직해서 1886~1889년에 일련의 파업을 일으키는데 성공합니다. 80년대는 사회주의단체들이 진출했던 시기이고, 비숙련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이것을 신노조주의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확대되자 90년대 법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된 것이 노동당 창당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민주연맹도 노동당 창당에 상당히 미온적이었는데, 하인드만이라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고 대중봉기를 통해서 사회변혁을 추구하려던 사람이었으므로, 마지못해 참여했다가 결국은 노동대표위원회(노동당)를 사회주의로 전향시키는데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자 탈퇴한 후 역사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독립노동당이 있습니다. 이 단체만이 영국 노동당 창당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1893년에 영국 노동당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영국의 윤리적 사회주의 전통의 중심적 인물이고, 영국 노동당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리 우는 케어 하디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당시만하더라도 영국사회에서 사회주의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했으므로 언론이나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주류였지만 케어 하디는 영국 노동계급의 정치화에 대해서 크게 희망을 걸지 않았던 집단들을 묶어서 노동당을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케어 하디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어떻게 설득하고 창당대회에서 노동조합을 회유하기 위해서 어떤 배려를 하고, 이런 것들을 보면 상당한 정치적 함의가 담겨있습니다. 이 사람은 철저한 사회주의자였지만, 혁명을 부르짖기보다는 성경 마태복음 5, 6, 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정신에 따라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사회주의적 공동체를 건설하다는 것이 이 사람의 이상이었고, 그 이상을 노동운동의 정치화를 통해서 실현하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거의 케어 하디 단독의 노력에 의해서 영국 노동운동의 정치화에 부정적이었던 세력들을 규합해내고 결국 이것이 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노동대표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사회주의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당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념도 채택하지 않은 채 목표 딱 하나, ‘우리 가능하면 많은 수의 노동계급 대표를 의회에 내보낸다.’ 만 내걸렸습니다. 중장기적 정책전망도 없이 이 하나를 위해 노조운동을 회유해야하고 페이비안소사이어티의 엘리트들을 끌어 모아야 했던 것입니다. 노동대표위원회는 상당히 모호하게, 그리고 초라하게 출발한 것입니다. 출발은 초라했지만 여러 사건들의 계기로 노동당은 빠르게 성장하게 됩니다.

노동당의 성장

창당 이듬해 테프베일사건 -보아전쟁의 특수를 타고 테프베일 이라는 철도회사가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이는데 그 철도회사의 노조원들이 파업을 일으키는데 실패로 돌아간다. 1901년에 이 파업에 대해 상원이 파업으로 테프베일이 입은 손해에 대해 노조가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을 계기로 노동자들이 대거 노동당에 가입하게 되면서 몇 년 사이에 노조원이 두 배로 증가하게 됩니다. 보수당과 자유당의 양당구조의 영국 정치의 현실 속에서 1903년 총선에서 램지맥도날드가 자유당과 선거 협약을 맺어 반보수연맹으로서 단일후보의 선거협약이 이루게 됩니다. 노동당 창당이전에는 노동자 정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당에 급진진형이 존재했었고 이 급진진형이 자-로 공조체제를 이끌었었습니다. 급진진형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셉 챔벌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위스턴 처칠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진보적 자유주의인 신(NEW)자유주의의 이론가(토마스 그윈, 홉하우스, 홉슨 등)들도 자유당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노동대표위원회와 선거 연합이 가능했던 것이고 1903년에 2개 의석에서 1906년 29개 의석을 차지하게 됩니다. 원내 세력이 생기자 그때 비로소 노동당이라는 당명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영국의 복지국가를 이야기 할 때 1900년에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고 1909~1911년에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을 중심으로 영국의 사회복지 개혁정치를 펼치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 복지국가는 본격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이지만 1909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당 입장에서 보면 노동운동이 정치화되었지만 자유당과 공조체제를 유지하는 동안 끊임없이 당내에서 노선 시비와 갈등에 노출되게 됩니다. 노조운동이 경제적으로 자신의 이익이 침해되었다고 느꼈을 때 정치화를 시도했고, 정치화가 이루어졌지만 자신들의 이익이 관철되지 않았다고 느껴지자 다시 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그래서 1911~1913년에는 생디칼리즘, 작업장운동 등 어마어마한 노조파업이 전개됩니다. 노동당내에 노선 갈등이 발생하고 노조운동이 정치보다는 다시 산업적 투쟁에 눈을 돌리게 되어 노동당으로서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전쟁은 노동당 발전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은 물론이고 2차 세계대전은 노동당이 하나의 수권정당으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전쟁 속에서는 전시경제체제를 운영하게 하므로 완전고용이 가능하게 되어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이게 되고 계급적 동질화를 높이게 되면서 공동체 의식을 높이게 됩니다. 거기에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면서 노동계급이 상당히 고무됩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인 1918년, 영국 노동당에게 가장 중요한 한 해를 맞게 되는데 노동당이 처음으로 사회주의 당헌을 채택하게 됩니다. ‘우리 당의 목표는 생산 분배 교환 수단의 공공소유에 있다.’ 고 한 그 유명한 조항 4로 명기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당으로 천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당원증에 이 조항 4가 새겨지는데 이것이 1995년까지 지속됩니다. 사회주의 정당으로 천명하고 거기에 걸 맞는 국유화 조치들을 다양하게 정책, 선거강령으로 제시되지만 정권을 잡고서는 그 정신에 걸 맞는 국유화라든가 사회주의 정책을 실천하는데는 굉장히 소극적이었습니다. 1979년 켈러한 정부 때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IMF의 조건을 이행하느라 켈러한이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기껏해야 노동당의 경제정책이 소위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총수요관리를 통해서 투자를 자극하는 경제정책이었는데 ‘케인즈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고용과 복지국가의 수단으로서 노동당에서 케인즈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케인즈주의를 포기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918년에 만든 사회주의 조항은 계속 유지합니다. 독일 사민당이 1959년 당헌 개정을 통해서 완전히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케인즈주의를 채택하게 되는데 영국 노동당은 이상하게 케인즈주의를 먼저 버리고 사회주의 국유화 조항을 계속 유지합니다. 국유화조항을 폐기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전 당원들의 반대로 유지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95년 토니블레어가 성공적으로 완전히 다른 당 목표를 교체하게 되고 문서상으로 1995년에 영국 노동당은 사회주의 정당으로서 종언을 구하게 됩니다.

노동당이 1918년에서 당헌에 조항 4를 만듦으로써 사회주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게 되고, 지금까지 없었던 당의 중장기 정책 강령 ‘노동당과 신사회질서’를 만들게 됩니다. 영국 노동당은 당의 정책강령을 당의 원외조직인 전국집행위원회에서 만들면 그것이 당의 최고정책결정기관인 당 대회에서 인준을 받게 되고 그러게 되면 그것이 당의 10년 정책 기조로 작동하게 됩니다. 즉 10년에 한 번씩 중장기 정책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사이에 있는 선거들은 이미 만들어진 정책 강령을 기초로 해서 선거강령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헌을 사회주의 당헌을 채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1923년, 1929년 사회주의적 선거강령을 만듦으로써 사회주의 정당으로 발돋움 하게 된 것입니다. 또 1918년 기존 단체가입만 가능했던 체제를 바꿈으로서 전국정당으로 체제를 개편하고 선거 체제를 정비하게 됩니다. 즉 지역의 노동단체, 조합들이 노동당의 지구당 역할을 하게 되고 노조의 힘이 조직적으로 더욱 강화되게 됩니다. 노조가 기피했던 사회주의 당헌을 채택하고 선거정당으로 체제를 개편하고 그 과정에서 당내에 노조의 힘이 강해지면서 1923년에 제2당으로 발돋움 하게 됩니다.

이 당시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으로 보수당과 자유당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보수당이 자유당의 내분을 틈타 자유당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동세력의 성장을 얕잡아 보고 노동당에게 집권의 기회를 주게 된 것도 큰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수정당으로서 첫 집권을 하게 되므로 상당히 불안한 집권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고 정책강령으로 내세웠던 급진적인 정책들은 거의 실천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노동당을 이끌던 맥도날드, 토마스, 스노우덴 등이 경제정책상에 보수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926년에 유명한 전국적 총파업이 일어나게 됩니다. 노동운동은 언제나 정치에서 만족을 못하면 거리로 나가고 거리에서 만족을 못하면 다시 정치로 돌아오는 반복을 거듭하는데, 이 때 총파업이 지금도 수치로 기억되는 실패를 경험하게 되고 1929년 노동당 맥도날드 정부가 과반을 넘지는 못했지만 제 1당으로 집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기가 대공황과 맞물려 있어서 긴축, 실업수당삼감, 미국 원조 등의 문제로 당이 내분상태에 머물게 되고 지도부가 대거 이탈하게 되고, 1932년 총선에서 270석에서 50석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이러면서 1930년대 노동당 안에서 전면적인 정책, 사상, 사회주의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젊은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총동원되어 어마어마한 논쟁을 거쳐서 영국 노동당의 사회주의를 다시 정리하여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를 당목표로 재확인하고 이를 통해 영국의 경제권력이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으로 이동해야한다는 것을 천명하면서 2차 세계대전을 맞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이 영국 노동당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전쟁 내각 구성 5명 중 2명이 당시 수상이 처칠에 의해 노동당 인물들로 채워 집권당은 대외 정책, 전쟁문제에 몰두하고 노동당으로 하여금 국내개혁을 전담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전쟁이 한참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 영국은 종전 이후의 상황을 계획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나온 것이 1942년에 베버리지 보고서가 나오게 되고 영국 노동당뿐만 아니라 보수당에서도 43년에 당대회에서 베버리지 보고서의 내용을 통과시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희생은 소련에 대한 영국국민의 인식을 호의적으로 변화시켜 사회주의를 친숙하게 인식하게 되고, 전시라는 어려운 상황속에서 국민들의 평등화, 동질화의 경험을 통해 계급적 연대가 단단해지고, 전시상황 극복을 위한 노동계급에 대한 회유 정책들로 인해 노동조합이 점차 주류정치의 정당한 일원으로 편입되게 됩니다. 1, 2차 세계대전은 노동계급의 급진화 시키고 종전 이후를 위해 계획된 정책들이 노동조합과 노동당을 중심으로 급진적인 형태로 구성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실시된 총선에서 전쟁영웅인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집권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600석 중 400석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함으로써 노동당이 전무후무한 압승을 거두게 됩니다. 최초로 과반이상을 통해 집권하게 되면서 에틀리 정부는 그동안 주창해왔던 사회주의정책들인 국유화, 사회복지정책들을 2번의 집권 속에서 전면적으로 실천에 옮기게 됩니다. 국유화의 경우 전 고용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산업을 국유화시킴으로써 서방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유산업을 보유한 국가로 우뚝 서게 되고 NHS를 필두로 한 6개의 복지입법을 통해 가장 선진적인 복지국가를 형성하게 됩니다. NHS 보편적 무료의료서비스 도입의 경우 의사협회 등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50년대까지 좌파운동의 대부로 불리운 나이 베반의 노력으로 인해 성공적인 도입이 가능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노동당이 6년의 집권을 하고 1951년 보수당 처칠정부가 들어서게 된 후 63년까지 이든, 맥밀란, 흄으로 이어지는 집권에 성공합니다. 에틀리 정부 때 8개 산업을 국유화하는데 그 중 특이한 것이 스틸 인 더 스틸이라는 굉장히 많은 이윤을 남기는 철강회사였습니다. 처칠 정부로부터 시작된 13년간의 보수당의 집권기간 동안 이러한 국유화 조치, 복지정책들을 되돌리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데 이때서야 비로소 영국정치가 케인즈주의적 합의정치에 들어섰다고 평가합니다. 굴곡이 있긴 하지만 대처 정부 이전까지 이 골격이 유지되었고 대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골격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실 처칠정부가 국유화 조치들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유화 조치가 사회주의적 조치였다고 평가하기 어렵다는 지점들 때문입니다. 즉, 그때 당시 국유화된 산업들이 사양 산업이거나 전기, 상수도, 석탄 등의 사업들을 국유화함으로써 국가가 자본을 투자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거나 공공재적 의미를 갖는 산업들만 국유화를 했던 것이었고, 유일하게 예외였던 것이 철강산업 뿐이었습니다. 원래 국유화 정신이 사회의 핵심적인 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경제 전체를 통제한다는 것인데 그것과 다른 형태의 국유화가 이루어진 것이고 따라서 보수당 처칠 정부가 철강산업만 다시 민영화로 돌려버립니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케인즈주의적 합의의 정치의 시대가 열렸고 이것이 대처정부 이전까지 유지됩니다. 영국의 정치 언론인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버츠켈리즘이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했는데 이는 처칠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버틀러와 노동당의 재무장관이었던 게이츠컬의 이름을 합쳐서 버츠켈리즘이라는 말을 표현하고 영국 합의정치가 보수당과 노동당의 합의를 통해서 막을 올렸다라고 평했습니다. 영국의 보수주의는 현실의 계급적 차이를 용인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상층부의 책임으로 여기는 정통적인 온정주의적 보수주의와 히즈 수상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실패했던 시장자유주의적 보수주의로 나뉘어지는데 대처가 시장자유주의적 보수주의를 성공시키면서 영국 보수주의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대처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보수주의가 노동당과 교차되는 지점들이 많았고 사실 유럽의 복지국가라는 것이 위에서 온정적으로 배풀던가, 밑에서 싸워서 얻어내든가의 혼합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영국의 경우도 싸워서 얻어내는 것과 온정적 시혜의 결합으로 복지국가의 발전이 이루어져 왔으나 대처정부 이후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영국경제의 특이한 점이 파운드에 집착한다는 것인데 파운드를 국가적인 자존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국경제가 어려워질 때마다 부딪혔던 문제가 파운드를 평가절하할 것이냐 그래서 수출을 진작시키고 제조업을 살리고 고용을 늘릴 것이냐 아니면 파운드를 지키고 초긴축 디플레이션 정책을 취할 것이냐 이것이 언제나 영국 정치 좌우에서의 논쟁입니다. 보수당은 파운드를 지키는 것, 노동당은 파운드를 평가절하하자는 것이 언제나 동일한 입장입니다. 영국 경제가 어려워지자 마지못해 노동당 정부가 1949년, 1968년에 파운드의 평가절하를 단행합니다. 평가절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가절하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디플레이션이 이루어져야하므로 그것으로 인해서 경제가 혼란스러워지고 노조운동이 격발이 되고 그러면서 1970년대 초에 노조운동이 급진화 되어 버립니다. 노조운동이 급진화 되면 노동당내의 급진좌파와 진보 지식인들이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노조를 동원해서 당내 공식적인 정책과정을 거쳐 당 정책을 급진화 시키는데 이를 통해 70년대 초 영국이 파업파동을 겪고 노동당정책이 급진화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때 에드워드 히드 수상이 “도대체 누가 영국을 다스리는 것이냐” 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는데 74년 노동당이 승리하게 되고 윌슨 정부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이후 1976년~1979년까지 집권한 켈러한 정부가 노조에게 약속했던 지키지 못하면서 정치로부터 눈을 돌리고 거리로 나가 파업을 일으키게 됩니다. 공공부분의 노동자들까지 파업에 동참하면서 병원, 소방서, 청소 등 사회기능이 마비되는데 이것이 유명한 78~79년 불만의 겨울입니다. 이 불만의 겨울을 겪으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대처입니다.

대처정부의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Q. 교수님께서 영국 노동당 사를 설명하시면서 인물사의 두드러짐에 대해서 설명해주셨고 정치인을 지식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처럼 설명해주셔서 우리 상식과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변호사, 의사, 교수와 같은 직업을 가져야 정치인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은 정치인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 정치에서 정치인과 지식인이 함께 갈 수 있었던 바탕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은데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저도 짐작을 하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영국의 문화적 전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국 정치계에 지식의 오랜 축적,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열정들이 있습니다. 영국은 우리가 얘기하는 지식층이 현실과 동떨어진 계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 로크, 리카도, 벤담, 밀 등 자유주의의 태동과 변화, 그것이 어떻게 진보와 사회적 자유주의 개념으로 변화하는지가 모두 영국에서 나왔고 나올 때 마다 현실 정치적 상황과 교환하면서 나온 것이지 지식계층에만 의존한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노정치인들이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는 모습들을 실제로 보면서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영국은 한마디로 기록의 나라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학습을 전제로 하고 있고 영국 정치인들은 대부분이 대중서가 아닌 학술서의 버금가는 책을 저술하는 저자들입니다. 이것의 기원이 어딘지는 저도 알 수 있지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상층부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지불해야 한다는, 자기들이 누리는 것만큼 사회적으로 소비되어야하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내가 누리는 돈-지식이 개인의 소유라기보다는 사회적 산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듯 합니다. 영국 노동당의 대표적인 정치인들은 마치 통과의례처럼 젊을 때 누구나 노동자, 빈민들을 위한 교육강좌를 여는데 헌신합니다.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같은 문화적인 기반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한국의 정통 야당이라는 민주당이 있습니다. 영국정치가 군소정당의 실험이 실패하고 결국 노동당으로 다시 귀결되는 모습을 이어지는 보인다는 말씀을 주셨는데 한국 역시 많은 정치적 실험들이 실패하고 민주당으로 귀결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민주당이 노동당 만큼 진보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민주당이 비전과 전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새로운 시도들이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결국은 민주당으로 귀결되고 양당제도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첫째, 민주당이 야당의 적통을 잇고 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고 둘째, 무엇을 계승하고 있느냐, 야당의 적통이라는 것이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민주당은 비어있는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이 반은 시장주의자, 반은 시장을 잘 모르는 모호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진보에 대한 개념규정이 나올 수 있을까 고민이 됩니다. 저는 민주당을 진보정당으로 정립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냥 상식이 통하는 정당으로서 새누리당에 대립하는 양당체제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적 힘은 정치가 급격하게 지형이 재편되지 않으면, 예컨대 선거제도가 대거 비례원칙을 도입한다던가와 같은 획기적인 변화 없이는 당분간 진보의 앞날은 암담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논력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분명히 보고 노력은 하되 도전자체가 어려운 상황이고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제도를 만든다는 의미도 있고, 때로는 사람이 제도의 역할을 해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국 진보정치의 가장 큰 패착은 사람을 길러내지 못했다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Q. 영국이 강령을 1918년에 생산 분배 교환의 공동 소유의 강령을 채택하였는데 NHS이외에 강령에 걸 맞는 정치를 펼친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A. 1918년에 사회주의 당헌을 만들고 정책강령을 만들고 첫 집권을 했지만, 소수정당이었던 만큼 자유당과 정책공조를 해나갔을 뿐이었고, 노동당 단독의 사회주의로 불릴만한 입법을 한 것은 없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실제 진보의 지고지순한 기준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회구성체마다 다르고, 각 나라의 역사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상황은 무시한 채 대한민국의 야당이 진보일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정치가 이렇게 어려운 조건 속에서 진보의 기준을 유럽의 기준으로 맞추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들 환원론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노동당 창당할 때 우리의 모델은 영국의 노동당이었습니다. 영국이 소선거구 제도에서 자유주의 정당을 넘어 양당구조로 들어갔다는 역사적 경험,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경험 하나를 바라보고 따라한 것이었습니다. 10년을 했고, 10년동안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지역구를 얻어낸 경험도 있고, 스스로 이른바 1인 2표제도인 비례대표를 헌법소원을 통해 만들어낸 것 역시 기특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합진보당이라는 이름의 실험을 통해 이루어냈던 선거 연합 등 이러한 실험들을 10년 동안 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노동당 모델을 통해서 보면 독자 정당으로서 실패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라는 물음에 다들 허무하게도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만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새누리당이 받아주나요? 혹은 민주당의 시장주의자들이 받아줄까요? 그게 무엇인지 이해도 못할뿐더러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설득도 되지 않습니다. 다 자신의 안정된 지역기반을 가진 사람이 무슨 이유로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겠습니까? 정치의 독점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안하겠다는데 우리는 그것만 얘기하고 현실의 피폐함과 어려움에 대해서는 피합니다. 환원론만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앞으로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만 도입되면 잘 될거야’ 라는 말만 왜 되풀이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답은 없지만 어디가나 학자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현실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 굉장히 중요하지만 힘든 것입니다. 영국도 소선거구제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손보려고 해도 벽에 부딪힙니다. 기득권의 힘이 그렇게 강한 것입니다. 제가 얘기한 것은 민주당의 성격에 대해 진단한 것인데 민주당이 야당 적통을 이어받았다는 것이 그 적통의 내용이 얼마나 공허한 내용인지 이미 최장집 선생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밝히고 있고 보수주의로 규정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것입니다. 보수주의의 기원이 어떻게 시작이 되서 어디까지 와있는지 설명되고 있지 않습니까? 민주당을 적어도 진보와 엮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민주당의 가장 큰 문제는 체계를 만들 수 있을만한 바탕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라도 그게 씨가 돼서 쌓아갈 수 있어야 되는데 조금도 없이 혼란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복지국가 청년캠프 강의 노트입니다

복지국가 청년캠프 때 개인적으로 신정완 교수님의 강의를 노트는데,

살짝 정리해서 공유합니다~

잘 정리된 것이 아니라, 노트 필기이니 양해바라고요,

혹시나 도움이 될까해서 공유하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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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신정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회민주주의란 이념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

어떻게 형성되어 발전해왔나에 대해 강의를 하겠습니다.

#1.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는 오늘날에는 중도 좌파 노선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징을 몇 개 보자면 우선 의회질서를 존중합니다.

또한 자본주의 경제와 관련하여, 자본주의 기본질서를 인정합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주로 시장을 통해 자원이 배분되고

소득이 분배되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적극적 국가 개입, 노동조합의 개입을 통해 분배에 개입합니다.

적극적 재분배원칙을 가집니다.

이런 분배 정책 이외에서도 노동자를 위시한 사회경제적 약자층이

사회적 의사결정에 폭넓게 참여하도록 노력합니다.

또한 노동조합 뿐 아니라 사회 여러 계층의 권익을 지키려 합니다.

민주주의를 떠올리면 정치적 민주주의를 먼저 떠올립니다.

일일일표, 다당제, 의사결정규칙으로서의 다수결 원칙 등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원리 바탕에는 평등주의가 깔려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사회적 지위, 성별, 연령과 상관없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등주의 원리가 정치 영역에서만 관철될 경우

이 이념이 충분히 구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곳이 자본주의 토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평등주의이념을 사회의 전 영역으로 확신시켜가자는 이념이

바로 사회민주주의입니다.
사회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대비할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Liberalism과 Democracy가 결합된 것입니다.

데모크라시는 기본적으로 누가 통치하느냐입니다.

국가의 주권이 어디로부터 나오는가를 묻습니다.

리버럴리즘은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냐 하는 것인데,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보고 있습니다.

데모크라시와 리버럴리즘은 갈등이 있습니다.

데모크라시는 평등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상적으로는 보면 좋고, 아름답지만

자본주의라는 구체적 경제 현실 속에서는,

돈 있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자유에는 차이를 용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일 경우,

부자들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습니다.

기업 활동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 간에는 내재적 갈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리버럴리즘에 제약을 가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종교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체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와 대비됩니다.

공산주의는 사회경제적 평등을 위해서라면 정치적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적 자유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나

공산주의보다 가장 충실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러시아 혁명 이전에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모호했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위해 자본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모두 사회민주주의라 했습니다.

막스주의 혁명적 무정부주의, 영국의 개량주의,

독일의 아살레주의, 등등이 사회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이 되면 막스주의가

사회주의의 지배적 이념이 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다양한 사회주의 이론 중에

막스주의가 이론적으로 가장 체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대부분 윤리적 이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도덕적인 꿈을 꾸고

그것으로 대중을 계몽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스는 윤리적 이상과 공유하면서도,

사회주의는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과학적인 역사적 필연이라고 봤습니다.

과학적으로 자본주의 발전 자체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역사적 필연이라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자본주의 발전자체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세력을 양산하고,

자본주의 발전 자체가 내부모순을 심화시켜 공황을 만들고,

소위 생산의 소유를 통해 기업이 커지고,

계획적 경제의 필요를 느끼면서 결국 공산주의의 발생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1890년대가 되면 독일 사민당 내부에서 논쟁이 생깁니다.

이러한 논쟁은 국제 사회주의 운동을 사민주의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으로 분열시키게 됩니다.

독일 사민당의 이상은 막스주의에 기반합니다.

그런데 실제 활동에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표를 위해 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핵심 활동가들은 이념에 관심이 없고

선거를 어떻게 이길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어떻게 복지예산을 늘릴까 하는 등 말입니다.

1890년대가 경제적으로도 호황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막스주의적 혁명을 표방한다는 것이

현실에 맞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이 때 베른슈타인이 막스주의의 수정을 요구합니다.

그는 이념과 현실의 괴리를 많이 느꼈습니다.

특히 농민에 대한 것입니다.

막스주의에 의하면 농민들도 농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생기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업과 농업에 특별한 구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농민 부르주아가 만들어지지 않고

농민들은 자신들을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민당에서는 특별한 농민정책이 필요 없었고,

지원하면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에 반동적이라 봤습니다.

따라서 베른슈타인은 이런 막스주의를 여러 가지로 비판했습니다.

역사 유물론과 변증법에 대한 비판도 했습니다.

막스 경제학을 비판하는데, 계급 양극화론을 비판합니다.

막스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계급을 나눴지만

독일의 통계를 보면 광범위한 중간층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념적으로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삶의 수준은 노동자가 아닌 층이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수정하여 지탱하는

형태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며,

자본주의 붕괴를 쉽게 말할 수 없다고 보게 됩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집권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농민과 포함하여 대다수를 포섭할 수 있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논쟁에서 사민당은 베른슈타인이 옳지 않다고 결정을 내렸지만

쫓아내지는 않았습니다. 애매한 상태로 진행됩니다.

이것이 사회주의운동에서 개혁파와 온건파가

만들어지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러시아 혁명입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 독일사민당을 포함한 서유럽은 부정적이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막스의 정신에 거슬러 만들어진 것이라 봤습니다.

막스는 자분주의가 성숙한 다음,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에 의해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주의가 만들어진다고 했는데,

러시아는 대부분 농민들이었고, 러시아의 모순은 자본주의가 아닌

봉건주의의 모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너무 무리하게 끌고 갔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혁명과정을 통해 일당독재가 구현되었기 때문에,

전통적 사회주의 이념을 근본적으로 훼손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은 1차 대전을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전에 유럽의 사회주의자는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혁명을 위한 계기로 삼는다고 했는데,

이것을 제대로 지킨 곳이 없습니다.

특히 독일의 사민당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주의 경우에는 혁명적 패배주의를 표방하며.

전쟁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러시아와 서유럽의 세력이 갈라서게 됩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서유럽이 러시아를 지지하지 않자,

레닌은 서유럽의 사회주의란 용어를 쓸 수 없다고 보고,

공산주의라는 말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코뮌테른을 만들어서 국제 사회주의운동이

공산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노선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나 경제체제에 대한 이상과 지향은 비슷했습니다.

모두가 국유화를 주장하고, 계획경제를 주장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도달할 것이냐에 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혁명적 방법과 의회를 통한 방법이었습니다.

#3. 사회민주주의의 여러 모델

서유럽에서는 연립정부의 형태로 사회주의당이 많이 집권하게 됩니다.

그런데 집권 사민당 중에 적어도 강령에서 주장했던 것을

제대로 진행한 곳이 없습니다.

국유화를 하려면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가 필요한데,

그렇세 못한 것입니다.

정책을 만들어갈 힘도 없엇고,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에 성공적인 곳이 스웨덴 사민당이었습니다.

자본주의를 기본적으로 인정하지만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대해 인정합니다.

그리고 국가는 수요관리를 해야 하고,

적극적으로 고용을 창출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케인주 주의를 보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속합니다.

그러나 고용, 빈곤의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상당부분 개입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스웨덴 사민당이 최초로 케인즈 주의를 수용합니다.

케인즈가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시작합니다.

공공근로를 대규모로 실행하고, 농민보호정책도 썼습니다.

보호무역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민당아 농민당과 협력하게 됩니다.

원래 적대적인 우파정당이었는데, 정책연합을 하고, 연립정부를 구성합니다. 사민주의 헤게모니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특히나 가족정책에 대해서 많은 변화가 이뤄집니다.

독일도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상당히 많은 노동입법이 시작됩니다.

지금도 노동조합참가제도가 가장 강한 것이 독일입니다.

다만 스웨덴과는 다르게 약점은,

공황국면에서 어떻게 그 시기를 극복할지를 잘 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량실업문제를 해결 못했습니다.

그 틈에 히틀러가 집권한것입니다.

영국의 경우에도 노동당이 집권했는데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서유럽의 사민주의 전성기는 2차 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입니다.

이 때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입니다.

따라서 경제적성과가 좋기 때문에 개혁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았습니다.

세금을 많이 걷을 수 있어 많은 개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전쟁 자체가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국민적 단합, 일체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개혁이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2차대전 직후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영국입니다.

에틀리 수상 아래 대규모 국유화를 진행합니다.

또한 NHS시스템이 도입됩니다.

#4. 사회민주주의와 스웨덴

스웨덴은 성과가 가장 좋았습니다.

이 때 스웨덴 모델이 만들어집니다.

스웨덴의 경제체제는 굉장히 자유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사회정책은 굉장히 평등적이고 국가개입이 높습니다.

온 국민을 위한 보편주의를 지향합니다.

스웨딘의 경제는 대기업위주였습니다.

수출대기업이 경제를 이끌고 갑니다.

기업의 의사결정에 국가가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대기업에게 유리한 정책을 썼지만,

재벌총수와 명시적 타협을 진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또한 케인즈의 거시정책을 받아들였고,

완전고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보편주의 복지국가입니다.

보편적 복지는 모든 프로그램을 보편적 서비스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다수 사회구성원이 세금으로 기여하고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지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조합주의입니다.

사회적 합의주의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정부가 정책을 입안할 때 사회 단체들의 의견을 반영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조합입니다.

문화적 차원에서는 대화와 타협을 지향하고, 실사구시를 지향합니다.

사민당에는 극좌와 극우파가 없습니다.

그러니 상당부분 타협이 됩니다.

단독으로 득표율을 50%넘게 받은 적이 없습니다.

서독의 경우에는 2차 대전 이후에 사민당이 아니라

기민당이 정치를 주도합니다.

서독의 2차 대전 이후를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강조는 시장경제에 잇습니다.

사회적이란 것은 사회 공통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반독점 정책입니다.

그리고 사회복지적 정책입니다.

그러나 경제적 분야의 정책은 보수적이어서,

완전고용보다는 물가조정을 주로 진행했습니다.

과거의 물가조정 실패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물가정책의 기조를 유지합니다.

스웨덴은 개혁정책을 쓰면서 막스주의와는 멀어집니다.

물론 막스주의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부분적으러 부정하는 것입니다.

막스주의로 현대자본주의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낍니다.

또한 소련 공산주의는 막스주의를 잘 계승하지 못했고,

오히려 서유럽의 사민당이 더 잘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5. 사회민주주의의 특징

사민주의가 되는 경로는 다양하다고 봅니다.

그 경로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럼 사민주의가 다른 이념들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물을 수 있습니다.

사민주의는 특정한 이념이나 세계관이 아니라 가치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자유, 평등, 연대, 박애 정신입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에 등장했던 것인데,

사실 이러한 가치를 표방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자유와 관련해서는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볼 수 있는데,

소극적 자유는 전통적 자유입니다.

타인의 간섭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적극적 자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자원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사민주의자는 소극적 자유는 기본이고,

적극적 자유까지 보장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평등도 좁은 의미의 자유주의자는 법적 평등을 말합니다.

조금 더 진보적인 사람은 기회의 평등을 말합니다.

사민주의자들은 결과의 평등까지 바라본다.

전성기 사민주의의 특성을 보면 전체적으로 정치적 자유주의를 존중합니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정치적 자유를 침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보적이고

제한을 많이 두고 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를 인정하되 상당한 부분 국가가 개입합니다.

이렇게 복지국가 노선을 설명하면 생산수단의 사회화 보다는

소비의 사회화를 신경씁니다.

소비의 자유를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대해서 이념적으로는 포기하지 않았으나,

국유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과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념적이 아니라 사회공학적으로 접근합니다.

또한 노동자의 권익을 강조합니다.

정치적으로도 노동조합과 협력해왔습니다.

또한 다양한 약자들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1970년대는 사민주의가 어려울 때입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합니다.

그러면서 80년대에 들어서서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됩니다.

완전고용을 포기하고, 물가조정으로 나아가고,

사회복지 지출을 줄이려하고,

노동조합을 약화시키는 입법을 하기 시작합니다.

시장근본주의적 흐름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또한 장기적 경향으로는 탈산업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제조업의 비중이 줄어들게 됩니다.

블루컬러들의 비중자체가 줄어드니,

사민당의 가장 큰 지지자였던 사람들이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업구조가 전환되면서,

노동계급자체가 굉장히 다층화됩니다.

고수익을 올리는 노동자들이 발생하게 되고,

하층 불안정 노동자가 발생하게 되고,

노동계급의 동질성이 약화되었습다.

노동계급 내부의 이해관계가 다양해진 것입니다.

또 하나는 60년대 까지 사민주의가 성공하여

어느 정도 틀을 만들어놓게 되면서,

그들의 열정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도 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사민당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투표의 유동성이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금융세계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노동자의 권익을 높이려 하면 자본이 외국으로 빠져나가게 되는

상황이 많아집니다.

자본이 나가지 않게 하면서 친기업적 정책을 쓰게 되었고,

사민주의정당이 들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89년부터는 소련이 붕괴하게 되는데,

이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목소리가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토니 블레어가 제3의 길을 주창하기도 해습니다.

금융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재분배를 하게 됩니다.

사민주의 정당의 우경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6. 사회민주주의의 한계

사민주의의 한계를 이야기 하면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스템을 구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사민주의는 표방하는 이념이 무엇이건 간에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비교적 평등주의적인 재분배 정책을 하자는 것입니다.왜 이렇게 되었는가?

1. 사민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여 안정적인 경우가 없다.

그러다보니 표를 얻어야 하고,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웠다.

2. 선거의 딜레마. 의회주의 노선은 위험을 수반하지 않고,

인정받을 수 있지만, 급진적 개혁을 하기는 힘들다.

광범위한 조직이 필요하기에 중간계층으로 지지폭을 넓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관성이 약화된다. 자본가계급을 심하게 침해할 수 없다.

자본가계급은 사회적 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크게 침해하기 힘들다.

의사결정이나 소유권을 침해하기 어렵다.

3. 개량이 딜레마. 성공을 하게 되면 만족하게 되고, 기존 체제에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발생합니다.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일반 대중의 정서와 멀어지는 것입니다.

4. 자본주의 경제 순환이라는 것이 있다.

호황에서는 사민주의적 개혁이 쉽다. 그러나 불황일 때는 어렵다.

경제회복의 키는 자본가에게 있고, 그들에게 친화정책을 펴게 된다.

5. 서유럽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비유럽지역의 사민당은 일본, 이스라엘, 브라질, 인도 정도다.

그러나 대부분 취약하다.

동구지방에서 만들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영향력이 취약하다.

6. 국제정치질서를 평등하게 바뀌어 가는데 있어서

역할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냉전질서와 국가가 격차에 대해 별로 개입하지 않았다.

선진국 이기주의측면도 있다.

#7.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

2차대전 이후 제3세계 사민주의 운동은 공산주의운동이었다.

왜? 대부분 식민지였기 때문에 반제국주의를 지향했고,

자연스럽게 반자본주의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둘째, 소련과 중국 같은 나라들이 제3세계를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이후에도 많이 개입합니다.

또한 초반에 소련의 경제 성장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입니다.

사민주의 정당의 조건이 있습니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형성, 일정한 산업노동자 인구.

그런데 이런 조건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농업 위주였고,

근대적 산업노동자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분단문제까지 있었기에 더 심했습니다.

그러나 사민주의 흐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여운형이 있습니다.

이념 노선이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였고,

사회주의적 요소가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중도좌파로 볼 수 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진보당이 있었습니다.

식민지시대의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이 당수였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사회경제적 개혁, 평화통일노선을 지향했습니다.

이만큼 성공적이었던 좌파는 없었습니다.

4.19직후에 여러 혁신 정당이 만들어 지고,

김철희라는 사람이 계속 그 노선을 지지해왔습니다.

80년대에 민주화운동이 가속화됩니다.

급진적 혁명 운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NL/PD노선이 있었고, 이 때 사민주의가 들어설 틈은 없었습니다.

한국 현실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NL/PD노선은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학생운동은 추상적 이념, 거대담론으로 가게 되어있고,

그렇기 때문에 급진주의로 가게 되었습니다.

90년대 들어서야 사민주의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소련붕괴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것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사민주의로 오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87체제 이후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민주주의 제도를 활용하여 사회개혁을 하면 된다는 사고가 생겨났습니다.

또 하나의 계기는 97년 외환위기입니다.

이것을 통해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정치적 민주화만이 아니라

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시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사민주의에 대한 생각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민주의는 지역연구 수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01년에 사회민주주의 연구회가 만들어지게 되면서

사민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연구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2003년에 한국사회민주당을 만든다.

그러나 곧 해산되었습니다.

우리 정당 중에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은 없습니다.

민주노동당은 국가사회주의와 사민주의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지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실질적이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NL도 사민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표방하지는 않습니다.

진보신당의 이념은 사민주의 좌파에 가깝습니다.

현재 사민주의와 가장 친화적인데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광의의 진보세력과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사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범진보적 세력이 표방하는 것은 복지국가이고,

그것의 이념은 사민주의입니다.

이것이 이념적으로 정리가 잘 안 되어있고,

정치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지만,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8. 한국에서 사민주의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첫째, 정치적 자유주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체의 자유를

체제적으로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둘째,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정하고, 시정해간다.

어느 정도 시정하느냐에 대해서는 열려있다.

그러나 적어도 분배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부분 가능할 것이다.

셋째, 의회민주주의를 존중하고, 의회민주주의를 통해 개혁을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의 직접행동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중운동과 함께 가되, 무게 중심을 정당에 두는 것이다.

대중의 봉기에 많은 기대를 걸 수는 없다.

최종적으로는 정당과 연합해야 한다.

넷째, 시대적 과제로서 한 세대의 핵심과제로는

복지국가의 건설을 내세워야 할 것이다.

다섯째, 노동자와 빈곤층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약자를 우선해야 한다.

좌파정당들도 정치공학적으로 접근 하다 보면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게 된다.

사실 가장 약자는 조직되지도 않고, 발언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진보라면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북한문제가 큰데,

사민주의자라면 북한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글로벌 차원의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린 노동자 조직률이 너무 낮습니다.

스웨덴의 LO는 제조업의 50%를 조직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노조의 기반이 너무 취약합니다.

이념적으로 훌륭해도, 공중에 붕 뜰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한국의 노조운동은 대기업 정규직 위주로 정착되었기 때문에,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념적으로 덜 계몽되어있고,

독재냐 민주주의냐에 대해 너무 집중해있었습니다.

그러한 관성을 넘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대통령 선거제는 진보정당에 불리합니다.

양당제로 가야 진보정당에 유리합니다.

스웨덴은 의원내각제에다가 100% 비례대표제입니다.

우리의 대통령제는 무책임을 양산합니다.

정당의 자산과 부채를 함께 계승해야 하는데 자산만 계승하려 합니다.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으로 가기 힘듭니다.

그리고 지역구도의 정치가 양화되고 있으나 여전히 힘이 있습니다.

또한 전체적으로 우경화되어있습니다.

경제학자는 압도적으로 그렇습니다.

또한 사민주의운동은 서유럽에서 발생했습니다.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이질감이 큽니다. 친숙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우리와 관계가 별로 없습니다.

사민주의가 한국에서 성공하려면, 토착화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조건과 역사 안에서 토착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린 그 조건이 열악합니다.

사민주의와의 관계에서 유의미한 것을 끄집어내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사민주의 이념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현실화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각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웨덴이 성공한 이유는 이념 토착화입니다.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그 역사를 계승하는 스토리를 만들어냈습니다.

한국의 역사에서 사민주의에 유리한 민주화운동이랄지,

좀 더 평등과 공동체적인 이야기를 가져오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스웨덴은 그렇게 했습니다. 상관없는 이야기를 끌어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거리가 멀더라도, 긍정적인 것들을 가져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민주의가 지배담론이 되려면

한국 사람이 가진 문화 정서적 자원들을 끌어오는 것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