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교수 초정 강연회 잘 마쳤습니다~

장하준이 말하는 ‘복지국가’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의 저자 장하준 교수가 어제 ‘복지국가’를 말했습니다. 장 교수는 산업경제학자이지 사회복지학자나 정치학자가 아니지요. 그러나 그가 말하는 복지국가 이야기에 청중은 깊은 공감을 보냈습니다.

23일 오후 서울의 한 강연장에는 300여 시민들이 “공정한 사회, 공정한 경제” 주제에 관심을 갖고 모였습니다. 사회복지 관련 학과 학부생과 대학원생, 고등학생, 노동운동가, 공무원, 일반 시민, 지자체 단체장 등 다양한 면면이었습니다.

<장하준의 복지국가 이야기>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두고 – 이재용 부회장과 투기자본 엘리엇 둘 중 누구의 이익이 우선이냐가 논란이다. 이것은 “농약 먹고 죽을래, 쥐약 먹고 죽을래?”와 같은 잘못된 프레임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같은 규모의 기업은 국민기업으로 관리하는 것이 국가와 국민에게 이익이다. 이재용을 교도소에 보낸다고 국민들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 유럽처럼 연합단위가 경영관리 하는 것이 대안이다.

우리는 60~70년대 경제개발로 경제 강국이 되고 일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목전에 두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문제는 이런 경제성장과 소득 증대가 ‘삶의 질’로 연결되는가? 이다. 두 가지 관건이 있다. 하나는 GDP와 일인당 소득은 총액이고 평균액이기에, 실질적 (기업별 개인별)개별 소득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재분배 구조가 부실해 결과적 불평등이 심하다. 복지지출이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인 것도 반증의 하나이다.
또 하나는 ‘삶의 질’은 소득이 높아진다고 자동으로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삶의 질은 ‘정치적 자유’와 ‘공동체 생활’과 ‘자아실현’이 조화롭게 충족되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불안한 ‘노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질’ 자체를 잊고 살거나, 포기하고 살거나, 허위의식에 빠져있다.

현대 경제학의 주류인 신고전파 경제학은 소비를 미덕이라 강조하면서 그에 희생되는 노동은 경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숨 쉬고 사는 하루의 절반, 인생의 절반을 노동과 그 노동을 위한 (출퇴근 시간 등의)부수적 행위에 쓰고 있다. 일은 신체적 지적 심리적으로 우리의 복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노동을 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사는 사회질서가 공정하다고 믿어야 행복은 가능하다. 우리사회가 공정한가? 기회가 균등한가? 결과도 균등한가? 스포츠에서는 그나마 기회와 결과를 함께 고민하면서 기준을 정하고 있다. 권투 레슬링 역도 태권도 등 종목에서 ‘체급’이라는 최소한의 기회기준을 두어 공정성을 담보하려한다. 우리 인생과 삶의 현장에 체급이 있는가? 약육강식 승자독식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시민권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를 진정 고민해야 한다.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사회복지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진보진영에서 말하는 ‘무상복지’가 실제 ‘무상’인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도 일상 소비행위에서 부가세를 내고 있고, 무상복지의 재원은 국민세금이다. 결국 공짜는 없다. 공동구매일 뿐이다. 가난한 사람은 낸 거 보다 좀 더 받는 것이고, 부자는 낸 거 보다 좀 덜 받을 뿐이다. 보수진영에서 말하는 ‘선별적 복지’는 단기적으로는 맞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속가능성이 떨어진다. 복지공동체 이념이 자본주의 발전에도 유리하다. 미국 자본주의 황금기였던 30~60년대 소득세율이 90%까지였으나, 레이건 정부이후 40%로 낮아지면서 미국경제도 어려워졌다. 이 기간엔 자본이득세도 40%에서 20%로 낮춰졌다. 미국의 의료비 지출이 GDP 대비 17%이지만 10%인 유럽에 비해 국민건강은 더 나쁘다. 공동구매인 보편복지가 개별구매인 시장경제 선별복지보다 우수한 것이 입증된 것이다. 물론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는 경로에는 ‘증세의 다리’를 건어야 하는데, 이는 목적세로 국민적 설득과 합의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다같이 ‘좋은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특히 대한민국을 더 좋은 사회로 만드는 노력을 한다면 ‘복지국가’에 대해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탄핵’을 줄기차게 외치니 탄핵되지 않았느냐. 복지국가 이야기도 계속해야 한다. 남녀노소, 서울과 지방, 시민과 학자, 모두가 한결같이 복지국가를 말하자. 정치가 복지국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진보 보수 간 정권이 왔다갔다해도 복지국가의 틀을 바꾸지 못하도록.
(23일 있었던 장하준 교수 초청 강연회 녹화 영상은 정리하여 조만간 유튜브에 올릴 예정입니다.)

* 장하준은 계획 경제와 시장경제의 절충안인 산업 정책 이론을 구체화시켰던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로버트 로손(Robert Rowthorn) 아래서 연구하며 비주류 경제학 분야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이 분야에서 장하준은 그 자신이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이라 부르는 경제학을 구체화하였다. 여기서 제도주의적 정치경제학은 경제사와 사회정치학적 요소들을 경제 상황의 진화에 있어 주된 요인으로 보는 경제학 이론을 말한다.(위키백과)

#세밧사 #사회연대네트워크

‘나는 ‘행복한’ 사회 복지사이고 싶다!’

어떤 일 하세요?

사람을 처음 만나면 가장 많이 주고받는 질문입니다.

“사회 복지사입니다.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일합니다.
나는 대답합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 되돌아옵니다.

“좋은 일 하시네요.대단하시네요.

13년 동안 사회 복지 현장에서 일해 온 나에게 익숙한 반응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도, 사회 복지사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대화가 불편합니다. 살짝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이 말을 들어야 하는지 한숨도 나옵니다.

“좋은 일 하시네요”가 불편한 이유

사회 복지사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회 복지사는 옳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회 복지의 목적이 ‘정의 구현’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사회 복지사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받습니다. 때로는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요받습니다. 과연 좋은 일과 옳은 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령 사회 복지 현장에서는 한정된 자원을 배분해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자원 배분에는 원칙이 존재합니다. 가장 취약한 사람, 가장 긴급한 사람이 우선이 됩니다. 당연히 우선순위에 따라 일을 했으니 자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 사람에게 사회 복지사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심한 항의를 받기도 하고, 욕설이나 험담을 듣기도 합니다. 사회 복지사는 옳은 일을 한 것일까요? 좋은 일을 한 것일까요?

옳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회 복지사는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원칙대로 일을 했어도 사회 복지사는 사과하고, 또 사과합니다. 유사한 일이 반복되면 자원을 작게 쪼개어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기도 합니다. 순위가 되지 않았더라도 불평이 많고, 힘든 고객에게 자원을 배분합니다. 사회 복지사는 옳은 일을 한 것일까요? 좋은 일을 한 것일까요?

상황이 반복되면 사회 복지사는 옳은 일과 좋은 일을 구분하기 힘들어집니다. 차라리 원칙을 버리고 목소리 큰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면 내가 더 편해지는 일도 많습니다. 욕도 덜 먹습니다. 보조금으로 운영되어 민원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사회 복지 기관의 골칫거리도 줄어듭니다.

만일 원칙을 벗어난 기관이나 동료에게 이의를 제기한다면 혼자만 잘난 척하는 말 안 듣는 사회 복지사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회 복지사는 점점 침묵하고, 말 잘 듣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불평 많은 고객에게, 기관 이미지를 중시하는 관리자에게, 편하게 일하고 싶은 동료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갑니다.

▲ 2013년 3월 29일 국회 헌정 기념관에서 열린 제7회 사회 복지사의 날 기념식에서 한 사회 복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료 사회 복지사들을 추모하는 추도사를 듣다 눈물을 훔치고 있다. 2013년 들어 이때까지만 3명의 사회 복지 담당 공무원이 ‘근무하기 힘들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연합뉴스

장애인 복지 현장을 떠나는 사회 복지사

사회 복지사의 노동 문제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나는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만 11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수용 시설로도 불리던 곳으로 중증 장애로 24시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이용합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회 복지사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낮 4시경 아홉 명의 여성 장애인이 좌식 테이블에 둘러앉아 과일을 먹고 있습니다. 역시 여성인 사회 복지사 한 명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낮 동안에는 사회 복지사 두 명이 장애인 열 명을 지원하지만 오늘은 한 명밖에 없습니다. 장애인 한 명이 미용실에 가야 해 사회 복지사 한 명이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렇기에 사회 복지사는 평소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세 명은 잘 씹지 못해 과일을 잘게 잘라주어야 하고, 한 명은 먹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다 간식을 잘 먹던 A 씨가 갑자기 간식을 더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안타깝게도 초고도 비만인 A 씨에게 간식을 더 줄 수는 없습니다. 더 살이 찌면 위험하기도 하고,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는 질책을 들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소리를 지르던 A 씨는 벌떡 일어나 주변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놀란 사회 복지사가 달려가 A 씨를 막아서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소리칩니다. 10분이나 이 상황이 계속되고서야 조용해집니다. 다행히 장애인 중에 맞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 복지사의 목걸이는 끊어지고, 목에는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남았습니다. 손목은 심하게 꺾여 통증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어 통증이 남아 있던 손목입니다.

뒤늦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팀장이 달려가 사회 복지사에게 괜찮으냐고 묻습니다. 사회 복지사가 대답합니다. “괜찮아요. 다행히 다른 분들이 안 맞았어요.” 둘이 마주 보고 씁쓸하게 웃습니다. 만약 사회 복지사가 아닌 다른 장애인들이 맞았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관리자나 부모님들에게 일을 제대로 못 했다고 질책을 듣게 되고 사회 복지사는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막을 수 없었다는 말은 핑계라고 치부 당하기 쉽습니다.

내가 일하는 곳에서 자주 생기는 일입니다. 견디다 못한 사회 복지사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상사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거의 같습니다. “예전에는 더 했어.”, “힘든 거 알지,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사회 복지사 마인드가 부족해.” 결국 직장을 떠나는 사회 복지사가 생깁니다. 2015년도 한해에만 장애인들을 직접 지원하는 사회 복지사 17명 중 8명이 그만뒀습니다.

옳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

장애인 거주 시설의 인력 구조에 대해 문제 제기 하면 사회 복지사가 본인들의 이익만을 내세우는 사람으로 몰리기 쉽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서비스의 질과 요구 수준은 엄청나게 높아졌지만 직원의 수는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모든 사회 복지사가 참고만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2015년 발달 장애인(지적 장애인, 자폐성 장애인) 거주 시설에도 인력을 추가로 지원해 달라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직장도 해당이 되었기에 협회에 의견서를 정성 들여 써냈습니다.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해하던 차에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협회에서 이 문제에 대응하려고 발달 장애인 시설 관리자들에게 협조를 구했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기관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어려웠을까요? 열악한 처우를 견뎌내는 것이 사회 복지사의 미덕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같은 길을 먼저 걸었던 선배들이고 상사들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화가 나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나는 지금 사회 복지사로 일하는 것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직접 장애인을 지원하는 일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지원하는 장애인에게 맞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매일 그렇게 일을 하는 동료들을 마주쳐야 합니다. 이렇게 일하는 우리를 당연하게 바라보는 사회와 마주쳐야 합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가 뜻을 모으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대다수의 반응은 냉소적입니다. “그게 되겠어?”, “그러면 좋지만, 말하는 사람만 찍히지.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데.” 이렇게 주어진 현실에 순응해 나가는 사회 복지사가 또 만들어집니다. 그 사람의 경력이 10년이 되고, 20년이 되면 후배에게 순응할 것을 강요합니다.

나는 사회 복지사가 좋은 일과 착함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회 복지사를 좋은 일을 하는 사람, 착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이 거둬지길 바랍니다. 사회 복지사들이 옳지 않을 일에 당당히 맞서고, 정당한 대우를 받으며 행복하게 일할 때 고객들도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나는 옳은 일을 하는 행복한 사회 복지사이고 싶습니다.

열악한 처우는 사회 복지의 미덕이 아니다
양혜정 사회 복지사| 2016.01.26 14:26:02

사회복지의 날, 표창장만 주면 ‘땡’인가?

9월 7일은 ‘사회복지의 날’이다. 2000년에 제정되었으니 올해로 16년째이다. 9월 7일이 된 것은 국민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공포된 날이 1999년 9월 7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회복지의 날은 국민의 복지 현황을 파악하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복지권, 즉 사회권의 보호와 신장을 국가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정부가 국민에게 그 대안 계획을 답하는 날이다.

그런데 지난 15년 동안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는 이날을 어떻게 보냈는가? 대개는 사회복지 종사자에게 표창장을 주거나 위로 잔치를 해왔다. 국민의 복지권 증진을 위한 현명하거나 참신한 복지 정책이나 ‘복지 5개년 계획’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고, 대충 행사로 때우려 하는 관행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모든 국민의 복지 증진을 도모해야 할 사회복지의 날이 기껏 사회복지 종사자를 위로하는 날로 왜곡되고 축소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반납하고 싶은 복지 꼴찌, 고통 1등 금메달들

우리 국민의 ‘삶의 질(복지)’ 현황은 어떠한가? 수없이 회자하여 이제는 국민 상식이 되어버린 수치들. 자살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 노인 자살률 OECD 1위, 노인 빈곤율 OECD 1위.

노동 분야는 어떤가? 근속연수 5.1년으로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으로 고용이 가장 불안한 나라 1위, 남녀 임금 격차 1위, 산재 사망률 1위, 연간 노동 시간 2위. 가계는 어떤가? 가계가 부담하는 공교육비 비율 OECD 1위, 가계 부채 증가율 OECD 1위. 이런 것들이 쌓여 복지 충족지수 OECD 31위, 국민행복지수 OECD 33위, 아동 청소년 삶의 만족도 OECD 꼴찌.

“복지 예산이 100조 원이 넘었네…” 하는 기사를 보았음에도 국민 복지 실태가 처참하기까지 한 것은, 과거보다 복지 지출이 증가했음에도 여전히 절대 규모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복지 지출에 인색한 것은 2014년 GDP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이 10.4%로 OECD 평균 21.6%의 절반 수준이라는 점이 증거다. 복지 지출의 비중은 국민의 생애 주기별 삶의 과정(보육과 교육, 일자리, 주거, 의료와 건강, 노후 생활)을 개인 복지로 보느냐 사회복지로 보느냐에 따른다. 우리나라는 개인의 책임을 원칙으로 하되 사회 책임을 보완재로 인식하고 있다. 결국 국민 개개인의 삶을 자유주의 관점에서 소극적 보충적 최소한으로 지원할 것인가, 사회 연대의 관점에서 적극적, 보장적, 최적으로 지원할 것인가의 문제는 우리 국민 사회 철학의 소산이다.

사회복지의 날은 복지 철학 논쟁의 날이어야

복지 재정의 규모를 논쟁하기 전에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 복지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먼저 해야 한다. 그 합의 수준에 따라 그 수준만큼의 재정을 마련하면 된다. 재정 마련 과정에서 상위 계층 10%가 전체 소득의 44.8%를 차지하여 미국 다음으로 불평등한 국가임도 문제가 될 것이다.

사회복지의 날에 복지 5개년 계획을 발표한다면, 그전 단계에서 정부는 국민과 함께 핵심 쟁점들을 토론해야 할 것이다. 사회복지 문제의 원인과 책임의 범위와 수준, 그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정리될 사회 규범과 연대의 범위와 수준, 예산에 맞추어 복지를 짤 것인가, 복지에 맞추어 예산을 짤 것인가? 증세는 필요한가, 불필요한가? 필요하면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 부자 증세로 할 것인가 보편 증세로 할 것인가? 일반 조세로 할 것인가, 목적세로 할 것인가?

사회복지의 날은 이런 쟁점들이 논의되는 날이길 바란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지금의 소강 사회에서 살 것인지, 대동 사회 복지 국가에서 살 것인지에 관한 국민의 치열한 사회적 논쟁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곧 우리의 21세기 복지 비전이고 자산이 될 것이다.

‘사회복지의 날’은 표창장 주고받는 날이 아니다

현장의 복지 운동 사회복지사들은 복지 시민 단체와 함께 2012년부터 사회복지의 날이 되면 광화문 광장에서 사회복지의 날을 그 제정 취지에 맞게 제대로 시행하라고 촉구해 왔다.

“사회복지의 날은 표창장 주고받는 날이 아니다. 노인 빈곤, 청소년 자살, 주거비 폭탄, 소득 양극화, 비정규직 차별 문제 등에 대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십 년 대계를 마련하라!”

그들이 떠난 자리에 무엇이 피어날 수 있을까 – 이명묵대표

그들이 떠난 자리에 무엇이 피어날 수 있을까
– 우리 스스로를 외면하는 아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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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묵 관장(서부장애인종합복지관)

(세밧사-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

 

 

지난 1월부터 5월 사이에 사회복지공무원 4명의 연쇄자살이 있었습니다. 그중의 한 분은  세달 뒤에 결혼식을 예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네 분의 자살이유는 과중한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였습니다. 문제는 이 스트레스가 개인적 스트레스였을까 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 견디고 있는데 왜 하필 그 사람들은 …… 식으로. 아직은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의 증언과 언론 취재 결과, 그들의 근무실태는 ‘국가 폭력’ 수준이고 부서 내 ‘깔때기 구조’로 다음의 희생자가 없을 것으로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희생자 한 분의 유서입니다.
“일이 많은 것 정도는 참을 수 있다 ……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인간이기에 최소한의 존중과 대우를 원하는 것이다.

공공조직의 제일 말단에서 온갖 지시와 명령에 따라야 하는 일개 부속품으로서

하루하루를 견딘다는 건 머리 일곱 개 달린 괴물과의 사투보다 더 치열하다.

내 모양이 이렇게 서럽고 불쌍하기는 평생 처음이다 …… “

 

사태 이후 정부에서 이런저런 대책이 나왔습니다만. 구조적 생리와 인력충원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입니다.  8월 중순 한 중앙 일간지에 실린 취재기사입니다.
“다들 이제는 세상에 얘기해봤자 소용없는 거 아니냐고 해요. 좌절의 늪에 빠져 있는 거죠.”

동사무소를 거쳐 지금은 한 구청에서 복지 업무를 담당하는 ㄱ씨(38)는 19일 힘없이 말했다.

“올해 2월부터 복지공무원 4명이 ‘살인적 업무량’을 호소하며 자살을 선택했어요.

그 뒤 반년이 지났지만 바뀐 게 없어요.

언론에 나와 공개적으로 얘기했던 동료들도 이제는 못하겠대요.

상사의 타박만 듣게 될 뿐이니까요.”

 

 

세밧사(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는 이 사건에 항의하는 일인시위를 지난 3월에 시작하여 90일째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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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부 앞의 촛불시위도 네 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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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세밧사의 활동에 대하여 사회복지계의 반응은 관망적이거나 부정적입니다.

“당사자인 사회복지공무원이 움직이지 않는데, 우리가 왜 행동해야 하는지 명분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많은 사회복지사가 공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이 움직이지 못하거나 안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세밧사도 답답합니다. 그러나 아픈 사람이 소리 내지 못한다면 누군가 대신 울어주는 것이 ‘연대’라고 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사회복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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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의 동향은 참고사항 일뿐, 세밧사가 문제 삼고 분노하는 것은 정부의 태도와 인식입니다.

사회복지사가 4명씩이나 업무상 자살을 하였음에도(그것은 명백히 국가명령에 따른 타살이었음에도) 보건복지부 장관이나 안전행정부 장관이나 국무총리나 대통령 누구도 책임 있는 사과를 안 한다는 점입니다.

사회복지를, 사회복지사를 얼마나 하찮게 보았으면 이러겠습니까? 보건소의 간호사 4명이 업무상 자살을 했어도, 공립병원 의사 4명이 업무상 자살을 했어도 정부가 이랬을까요? 간호사와 의사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외면하는 정부도 문제이지만, 자신을 외면하는 우리 스스로가 더 문제라고 봅니다.

 

“사회복지공무원은 우리와 다르다. 심지어 그들은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이 아니라 그냥 ‘공무원’이다.”라는 민간 사회복지 현장의 인식에 대하여 토를 달지 않겠습니다. 1987년 전담공무원제도가 도입된 이래 민간 현장이 26년간 겪은 결과임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세밧사가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고 항의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마틴 니묄러의 시 「그들이 들이닥쳤을 때」로 대신합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지 때, 나는 침묵했다.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유대인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 슬픈 것은, 자신의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호소했던 분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유서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지들이 약하고 못나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으로 내 진심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사라진 다음, 뭔가가 바뀌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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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를 복지국가 열망으로 바꾸자

48.0%를 복지국가 열망으로 바꾸자

이명묵

국민이 대선마트에 간 까닭은?

18대 대선이 끝난 지 열흘이 지났다. 보수 쪽은 “다시 한 번 잘 살아보세”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어 있는데, 진보 쪽은 패배원인에 대한 분석을 계속하고 있다. 그만큼 트라우마가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1987년 대선(노태우 승리)은 소지역 선거였고, 1992년 대선(김영삼 승리)은 대지역 선거였고, 1997년 대선(김대중 승리)은 지역연합 선거였고, 2002년 대선(노무현 승리)은 인물선거였고, 2007년 대선(이명박 승리)은 정권심판 선거였다. 이와 비교해 2012년 18대 대선은 보수와 진보의 한판 승부였다.

이번 대선의 화두는 단연 복지였다. 민주당은 보편적 복지상품을 들고 나와 복지국가를 외쳤다. 새누리당은 선별수준이긴 하나 이전 보다 개량된 복지상품을 내놓았다. 대선마트 복지코너에서 지갑을 만지작거리던 소비자가 막상 선택한 것은 ‘새누리표 복지’였다.

품질에서 보자면 ‘민주표 복지’가 훨씬 우위였음에도 소비자가 의외의 선택을 한 것은 왜일까? 복지상품을 보는 안목이 소비자에게 없었나, 아니면 민주표 복지의 마켓 론칭이 미숙했었나? 그도 아니면 소비자가 대선마트에 간 것은 복지 상품보다는 식료품 구매가 주된 목적이어서 복지 코너에서의 고민은 대충했다? 이도 아니라면, 대선 마트에서는 아이 쇼핑만 하고 투표장으로 기싸움하러 간 걸까?

48.0%도 과분하다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48.0% 득표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지만, 복지운동 차원에서 보면 민주진보 대오가 들고 나온 공약(일자리, 경제민주화, 복지국가)이 이만큼 지지를 받은 것이 과분하기도 하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민주진영이 압승을 거둔 것은 복지운동 출발의 기회였고, 2011년 8.24 서울의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이어 치러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두 번째 기회였다. 그런데 이 두 번의 기회를 ‘분위기’ 정도로 흘려 보내버렸다. 복지국가에 대한 일관된 철학과 의지가 결여된 전략부재가 2012년 총선과 대선의 패배로 이어졌다. 더군다나 총선 비례득표에서 (새누리당과 자유선진당에 비해) 0.8% 앞선 민주진보진영이 대선에서 3.6%로 역전패한 것은 (투표율 54.2%와 75.8%의 분석과는 별개로) 명백한 패배이다.

2010년 이후 복지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신자유주의 산물인 국제금융위기의 여파로 삶의 환경이 망가져버린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민주진보 진영은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세 번의 선거에서 승리하였지만, 이 분위기를 ‘운동화’하지 못하면서 뒤이은 올해 두 번의 큰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역사의 전환점을 놓쳤다.

대중의 공감이 관건이지만, 장애물이 너무 많다

복지운동은 복지혁명과 다르다. 혁명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행동세력이 집권세력을 붕괴시킨다면, 운동은 쟁점과 비전에 공감하는 대중이 (때로는, 선거를 통하여)세상을 바꾼다. 운동이 성과를 내는 데는 쟁점을 만들어내는 의제생산 능력과, 비전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관리 능력 있어야하고, 의제생산과 비전공감을 총괄하는 (집단 또는 개인적) 세력이 있어야한다.

2010년 이후 복지쟁점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중심으로 격렬하게 생산되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정치권을 공동저작권자로 인정하는 것까지 주저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공동생산자로 끌어들이고 유통시키려했다. 이 시도는 천둥번개와 같이 한순간에 정치권을 경악스럽게 장악하였지만, 2012년 4.11총선을 전후로 복지국가 태풍은 잦아들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부침은 곧바로 우리 사회 복지쟁점 생산력에 영향을 미쳤다. 사실 복지쟁점 생산이 어느 한 싱크탱크에 지나치게 의존해 온 현실이 문제였다. 사회복지학자와 현장 사회복지사들, 정치인들, 시민사회단체들은 복지쟁점 생산에 앞장설 책무가 있음에도 그들은 소극적이었거나 무능력했거나 개념이 없었다.

논점이나 의제설정을 포함함 복지쟁점 생산보다 더 어려운 것은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다. 생산자의 대부분이 지식층이거나 운동권이란 전제에서, 그들의 뇌에서 생산되고 그들의 언어로 포장된 복지담론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데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 하나는 대중소통에 대한 그들의 의지와 능력이 부족하고, 하나는 쟁점과 의제를 사회적 비전으로 디자인하는 능력의 부족, 또 하나는 언론시장의 90%를 보수성 매체가 차지해 정보환경도 열악하다. 이에 더해 가장 큰 장애물은 지난 100년 동안 대부분의 세월을 우리 국민들은 반복지적 환경에서 숨을 쉬면서 살아와 그 삶의 역정이 우리 사고의 틀을 결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단도 통로도 모두 여의치 못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생산과 공감을 일정하게 총괄하는 국민적 세력이 있었나? 정당이 이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치권, 시민사회단체, 사회복지계를 비롯한 학계 어디에도 대안 세력이 없었다. 개별세력이 없으니 연대세력도 없다. 사회복지계에 ‘복지국가사회복지연대’, 시민사회단체계에 ‘복지국가실현연석회의’ 등이 있으나 역사가 일천하고 개점휴업상태와 다름 아니었다.

인권운동인 복지운동은 섬세하고 대범해야

위와 같은 복지운동 환경을 감안할 때, 복지국가를 내세웠던 문재인의 48.0% 득표는 엄청난 성과이지만, 그것을 오롯이 복지운동의 결실이라 말하기에는 낯간지럽다. 48.0% 안에는 복지국가의 지지보다 정권교체의 열망이 더 컷을 것이다. 4~5년 주기의 선거 때마다 정권심판(여당에서는 정권수호나 정권연장)을 주무기로 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옹색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국가’가 우리 사회 발전단계의 순리라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수많은 사회  경제  정치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좋은 대안이라면 …… 복지국가운동을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

굳이 ‘종합’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앞으로의 복지(국가)운동이 다원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복지의제의 생산과 유통[공감]과 관리의 삼각편대가 고공전과 지상전을 동시에 수행해야한다. 생산의 다원화가 (학계, 정치권, 시민사회)각각의 영역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생산의 다원화는 다양성을 낳고, 복지운동의 기반을 확대하고 공고하게 할 것이다.

복지의제가 유통을 통하여 공감되는, 공감하는 과정에서는 특히 복지계와 시민사회계의 현장활동이 중요하다. 쟁점의 생산과정을 고공전이라 한다면 의제의 공감과정은 지상전이다. “저소득층이 가장 보수적이다”, “50대가 신보수층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 경로당에서, 재래시장에서, 주부들 모임에서, 은퇴자 모임에서 복지 쟁점과 의제가 유통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언어로, 그들이 말하도록 해야 한다.

무엇을? 복지 쟁점과 의제 그 자체가 주제가 될 것이 아니라 삶의 규범이 주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 무상급식이나 무상의료나 국민연금기금문제가 아닌,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몸이 아플 때는 병원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후세대 양육에 모든 것을 써버린 퇴직세대의 인생은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위에서 말한 공감형성의 수단과 통로의 불리함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쟁점이 의제로 전환되면서 우리 사회의 규범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가 복지운동의 관건이다.

복지운동은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개념과 사회 구성원의 그러한 삶[인권]을 담보해내는 사회구조에 대한 규범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세상살이를 결정하는 사회적 여건(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인권)에 대한 개념과 규범을 공유하는 과정이 지루하고 지난할 수도 있지만, 이 과정 자체가 복지운동이고 인권운동이다.

마지막으로 복지운동의 연합세력 즉 연대의 문제이다. 연대에는 실질적이고 다양한 개별세력의 존재가 전제된다. 연대의 또 하나 전제는 인권과 복지국가에 대한 규범을 세우고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다. 복지국가가 장기간에 걸친 복지운동의 결실이라면, 지속적인 복지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섬세하고 대범한 행위가 필요하다. 연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섬세함을 간과했거나 대범함에 주저했을 것이다.

48.0%를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바꿀 수 있다면

(조장과 선동의 문구로 종종 사용되는)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하지만, 2012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진보는 단결했지만 패배했다. 자기들만의 단결로는 안 된다는 증거이다.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 국민과 함께해야 한다. 국민들 편에서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소통이 (선거철에만 반짝할 것이 아니라) 복지운동과 시민생활의 일상이어야 한다. 결국에는 국민이 복지운동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될 때, 이 땅에 복지국가가 들어설 것이다. 시민단체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처럼, 보통 시민이 보편적 복지의 규범으로 깨어나, 국민이 복지운동의 주체로 조직화 된다면 복지국가는 현실이 될 것이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과정을 뛰어넘는 결과는 없으니 시간은 괜찮다. 우리가 길을 정하고 그 길을 함께 가고 있다면.
정권교체의 열망이었던 48.0%를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으로 바꾸는 것은 어떨까? 복지국가로 가는 길에 정의, 인권, 평등, 민주주의라는 초석들이 필요한데, 대개 이것들을 주창하는 이들은 세력이 왜소하다. 이들이 50.1%의 지지를 연합해 낼 수만 있다면 의회와 행정부를 통한 복지국가계획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2012년의 48.0%를 복지국가에 대한 온전한 지지로 바꾸는 것을 복지운동의 1차 목표로 설정해보자. 불가능할까?

<위 글은 프레시안(2013.1.3.)에 게재된 것을 수정한 글입니다.>

청년 사회복지사가 만드는 복지국가

청년 사회복지사가 만드는 복지국가

이명묵

21세기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 그중에서도 청년의 세대적 사명을 생각해본다. 20세기 전반, 우리 선대는 조국 독립을 위해, 해방 직후에는 통일을 위해 싸웠다. 한국전쟁으로 폐허된 나라를 지독한 가난에서 일으켜 세워 오늘의 물질적 풍요의 기초를 다진 분들이 지금의 70~90대다. 30여 년간의 군부독재와 맞서 (정치적)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이 땅에 자유의 길을 열은 분들이 지금의 50~70대다. 20세기 한 세기 간의 선대의 헌신으로 독립과 풍요와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을 사는 20~40대는 (삼포세대의 고통을 안고 있음에도) 선대 3대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선대의 각 세대는 살았던 시대는 달라도, 본인들이 겪고 있는 시대적 고통을 후대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은 같았다고 본다. 당대의 과제를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 초반, 이 시대의 과제는 무엇인가? 나는 다음의 여섯 가지를 꼽는다 – ‘분단의 고착과 통일의 미제’, ‘물질 예속의 가속화 속에서의 인간성의 피폐화’, ‘양극화의 심화’, ‘고용문제에 따른 현실의 불안’,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미래의 불안’, ‘불완전한 민주주의’. 이는 곧 여섯 가지 대안 – ‘평화’, ‘정신문화와 탈상품화’, ‘사회연대’, ‘일자리’, ‘생애복지’, ‘온전한 민주주의’ -을 목표로 삼게 한다.

6대 과제의 해법은 ‘복지국가’

그러면 이 대안의 근간들은 무엇일까? ‘평화’는 국내뿐만 아니라 남북한과 동북아의 국제정치 지형과 밀접하여, 사실 “복지국가가 답이다.”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머지 다섯 가지에 대한 대안의 근간으로는 ‘복지국가’가 최적이고 최선이다. 물신주의는 정신의 결핍에서 오기도하지만 보통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서 일상 생존의 조건(교육, 일자리, 주거, 보건, 노후)이 각자도생에 맡겨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흥하는데, 보편적 복지로 개개인 삶이 불안하지 않게 되면 물신주의 기세가 수그러든 자리에 정신문화가 들어서 인간성이 회복될 것이다. 물신주의와 금융자본주의(21세기 천민자본주의, 약탈자본주의)가 낳은 양극화는 사회집단 간, 경제단위 간, 지역 간에서 발생되는데, 그 격차를 완화하고 사회경제지역적 통합을 이끌어내는 것은 각 단위 간의 평등성을 존중하는 사회연대 틀의 기둥인 복지국가에서가능하다.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뿐만 아니라 고용의 심리적 안정은 노동과 복지를 연계하는 복지국가 체제가 대안이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재정 부담이 크지만 경제적 효과가 가장 큰 것으로, 생애 주기별 보편적 사회정책이 체계화된 복지국가 전략 없이 인구문제 해결책은 없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1987년 이전을 제1의 민주화 운동기라면, 이후 25년이 지난 시점에 사회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온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제2의 민주화 운동이다. 2010년대에 제2의 민주화 운동을 준비하는 것은 46년 전에(1966년) 선포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따른 인권운동이기도 하다. 즉 정치적 민주주의에 이어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사회적경제적 권리를 담보하는 복지국가 체제를 갖추자는 것이다.

복지국가 담론이 더욱 뜨거워야 하는 이유

우리나라에서 2010년부터 회자된 ‘복지국가’ 담론은 일부 싱크탱크와 학자들과 시민사회단체가 촉발시켰고 그것을 정치권과 매스미디어에서 받아 활용였으나, 2012년 4.11 총선이 끝나면서 1차 흥분기는 가라앉았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2012년 총선과 대선까지 약 2년간의 정치시즌과 맞물려 복지국가 담론은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여야 모두 역사적 철학적 고민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표퓰리즘적이었던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복지국가 논쟁을 정치권에만 맡겨두면 이러한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최근 복지국가 담론의 후퇴가 안타깝기는 해도, 재정비 기회로 삼는다면 오히려 호기일 수 있다.

복지국가 담론이 더욱 뜨겁게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장의 우리 사회 6대 과제에 대한 해법으로 복지국가 이상의 최적의 대안이 없다는 점과, 둘째 지난 50년 간 성장일변도의 국가경영에 따른 공과를 건강한 국민공동체로의 전환이 필요한 지점에 다달았고 새로운 국가이념은 복지국가이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과, 셋째 전혀 이질적 체제이면서 심한 격차를 보이는 북한과의 통일을 대비한다면 남북한 주민이 융합할 수 있는 있는 체제를 고민해야하는데 경쟁보다 연대를 원칙으로 하는 복지국가가 남한에서 먼저 운용되어야 한다는 점과, 넷째 글로벌 국가 경쟁시대에 우리나라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생존을 위해서도 복지국가는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면 복지국가 논쟁은 누가 주도하고 누가 참여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대중논쟁은 ‘정당’과 ‘선거’가 주도했다(지식인 논쟁은 진보적 싱크탱크들이 주도했고). 그들의 관점은 표퓰리즘 일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국민들 관점의 표퓰리즘을 생각한다면; 정당이 국민을 향하여 “복지를 줄 테니 표를 주세요.”가 아니라, 국민이 정당을 향하여 “복지국가를 받으면 표를 주겠다.”가 되는 것이다. 국민이 주권자이고,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권리에 기반한 국민의 정치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금 더 낼 테니 나와 내 자식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라”가 된다. 그런데 한 나라에서의 (복지)국가 상은 국민들의 합의 수준 그 자체이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국민의 사회철학적 인식이 최대 변수로 등장한다. 보편적 복지정책은 거지근성만을 키울 뿐이라고 주장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복지국가를 지향하다가는 남유럽 국가들 꼴 난다고 확신하는 국민도 많다.

복지국가 담론은 현장 사회복지사가 주도해야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 사회복지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복지국가 담론이 사회복지학자나 사회복지사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 사회복지 현장의 일상과 연관이 없어 보일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복지현장의 사례들 대부분이 복지국가 시스템 부재의 현실과 직결되어 있다고 본다.

먼저 현장 이야기. 사회복지사가 만나는 클라이언트 개인의 문제는 대개 가족의 문제이고, 가족의 문제는 지역이나 사회구조의 문제이고, 그 문제는 사회정책이나 사회체제와 연결됩니다. 사회복지서비스는 사랑이고 전문가적 영역으로 사회복지사 개인의 역량이기도 하지만, 그 스펙트럼의 근저에는 우리 사회 공공 안전망(사회보장)의 역량이기도 합니다.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지 않고서는 현장의 문제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즉 개인의 문제를 개인과 가족의 문제로 한정짓기 보다는 사회적 관점에서 인식하고 공공의 체제를 갖추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회복지사가 복지국가 논쟁과 운동의 주체세력으로 나서길 간절히 소망한다. 복지국가 담론의 주요 이슈는 보육교육, 일자리, 주거, 건강, 노후이다. 이것은 사회복지학과에서 공부했던 최우선 사회보장 주제이고, 국민의 복지권과 사회권인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마땅한 전문가는 사회복지사이다. 이 다섯 가지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주민들을 전국의 사회복지사는 일상으로 만나고 있다. 그들의 문제를 지금까지는 사회복지사 개인이나 복지시설 단위 차원에서 지원하고자 했다면, 복지국가 담론은 (일시적 대증적이 아닌)사회적 공공의 차원에서 일상의 체계로서 고민하는 것이다.

연말이면 매스컴에서 백혈병이나 소아암 환아 치료를 위한 모금프로그램을 한다. 이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생명을 모금성과에 의존한다? 대한민국에는 국민의 나라가 없다는 말이 될 수 있다. 사회복지사는 케이스워커이고 프로그램워커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소셜워커로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전문가이다. 세상을 바꾸는 활동가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기에 너무 힘들어하는,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의 삶을 속속들이 그 실상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집단이 사회복지사이다. 복지정책은 현장에서 나와야 한다. 복지국가 담론은 현장 사회복지사가 주도해야 한다.

청년사회복지사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을 바꿨다

앞으로의 복지국가 쟁점은 크게 두 가지 일 것이다. 하나는 어떤 유형의 복지국가냐. 영미형이냐 북유럽형이냐 아니면 제3의 모델이냐? 또 하나는 개별 이슈이다. 무상의료, 국민연금, 비정규직, 대학등록금, 아파트값, 실업과 비정규직, 복지재정과 증세 등등. 물론 이러한 이슈를 본인들의 과제로 이해하는 사회복지사가 많지 않다. 사회복지가 ‘삶의 질’의 문제라고 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국민들 삶의 질을 좌우하는 이러한 문제에 사회복지사가 천착하는 것은 떠안아야 될 직업적 책임이다. 지금까지 사회복지사는 긍정적으로는 ‘사랑의 천사’, ‘복지헌신자’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부정적으로는 ‘온실 속의 난초’, ‘월급쟁이 복지사’, ‘정부 복지정책 하청업 종사자’ 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게 다일까?

청년 사회복지사가 복지국가 담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주도적으로 운동하는 것은 피동적 복지실천가에서 능동적 복지활동가로 정체성을 변환하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 권리로 인식하면서 제2의 민주화 운동 또는 인권운동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서 주변인으로 한 발 물러섰던 자리에서 ‘선구자’로 자리 변환하는 것이다. 여섯 가지 이 시대의 과제를 사명으로 고민하면서 복지국가 운동에 앞장서는 것은 청년 사회복지사들이 ‘세대적 책임’을 자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초반을 살았던 청년 사회복지사들이 한국사회 복지국가 운동을 주도했다고, 그들 때문에 5천만 국민의 삶의 질이 달라졌고 사회연대가 구축되었다고, 평가받기를 기대한다.

<위 글은 프레시안(2012.8.9.)에 게재된 것을 수정한 글입니다.>

“사회복지사가 나서면 세상이 바뀐다”

나는 경력 5년차 사회복지사다. 애초 사회복지사를 꿈꾸었던 이유는 지구를 지키고 세상을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말 사회복지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50만 명이나 되는 사회복지사들이 한 곳에 뭉쳐서 외친다면 어떤 것이 불가능하겠는가.

하지만 현재로선 세상을 바꾸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50만 명 모두가 진짜 사회복지사가 아닐뿐더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회복지사들도 일터 바깥 세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사회복지사들이 혼자만의 가슴 속 울림으로 간직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경험적으로 드러난 실체가 없으니 관심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도 무방할 듯하다.

자기 일터에 충실한 사회복지사를 비판하고자 함은 아니다. 사회복지사가 여전히 어려운 근무환경 속에서도 많은 변화와 가능성들을 만들어 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사회복지사가 자신이 속한 현장에 충실함으로써 만들어 내는 가치들이 소중한 것임은 사실이므로, 그들은 여전히 사회 속에서 필요한 존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사회복지사, 자신의 직업윤리를 성찰할 때

사회복지사들이 자신의 업무에 충실함에도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자신이 지지하고 있는 당사자들의 삶 역시 변화되지 않는 현실이 아프다. 이러한 경험을 자신의 한계, 혹은 이 사회의 한계로 치부해버리고 동일한 업무와 태도로 현상유지적 활동에 안주하고 있다면 사회복지사 스스로 자기 직업윤리 의식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에는 실재하는 직업윤리가 존재한다. 사회복지사윤리강령의 전문을 보자.

“사회복지사는 인본주의, 평등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천부의 자유권과 생존권의 보장활동에 헌신한다. 특히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사회정의와 평등,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앞장선다. 또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저들과 함께 일하며, 사회제도 개선과 관련된 제반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이 윤리강령의 전문은 사회복지사라는 직업군에 포함되면서부터 사회복지사는 사회정의와 평등,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고 사회제도 개선을 위한 주도적 세력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한국사회복지사들이 지켜 나가야 할 하나의 윤리이다.

사회복지사 각자는 일터에서 경험하는 한계, 개인의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사회구조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강제에 대해 저항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가진다. 하지만지금 한국의 사회복지사는 권력이 이행하고자 하는 제도에 어떠한 저항 없이 순응하며 보통의 시민들에게는 착한 사회복지사의 이미지, 비판론자들에게는 복지 하청업자라는 오명만을 써오고 있지 않은가.

왜 장애인들은 스스로 이동권 쟁취를 위해 나서야 했을까?

사회복지사의 역할에 대한 성찰을 위해선 지난 10년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는 조직을 주목해야 한다. 장애당사자 조직인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다. 2001년 지하철 오이도역에서 리프트 추락사고로 장애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문제의 해결과 장애당사자의 이동권 쟁취를 위해 장애인이동권연대가 출범했다.

장애인이동권연대로 시작된 이 운동은 그들의 구호처럼 차별에 저항하면서 많은 것을 쟁취했다. 도로, 철로 등 대중교통시설을 점거하기도 하고, 심지어 한강다리를 맨몸으로 기어서 건너기도 하면서 그들은 운동시작 4년 만에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 입법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후 특수교육법 개정, 장애인차별금지법 입법화,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제도 도입, 청계천 엘리베이터 설치, 저상버스 확대, 지하철역사 엘리베이터 설치 확대 등 장애당사자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많은 사회적 권리들을 얻어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인해 장애당사자의 삶은 변화했고, 대한민국의 당당한 시민으로서 일어서고 있으며, 이 운동은 여전히 많은 도움이 필요한 장애당사자의 권리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 폭력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그들의 요구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그때를 생각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장애당사자 스스로에게만 부여된 사명이었을까?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이 설명하는 혹은 현장에서 경험적으로 부딪히는 사건들로 볼 때, 이는 분명히 사회복지사들의 역할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들의 운동이 사회복지사의 일자리를 늘려주고 사회복지사가 해결하지 못한 업무들을 소화하는 역할까지 했으니, 사회복지사는 가히 이 운동의 수혜자라고 볼 수도 있겠다.

▲ 2005년 6월 29일, 장애인이동권연대 회원들이 지하철 서울역 1, 4호선 환승통로에서 리프트에 쇠사슬을 설치해 몸을 묶으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고 있다. 이들은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4년까지 지하철 전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어겼다”며 “46개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아닌 리프트를 설치키로 한 것을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연합뉴스

사회복지사, 조직된 힘이 필요하다!

당사자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차별에 저항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 왜 사회복지사는 함께 존재하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 조직된 힘의 부재가 아니었을까? 문제를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혼자 감히 덤빌 수 없는, 그래서 정체되거나 이탈하는 현실이 반복되는, 그것이 사회복지사가 이 시대의 부정의에 덤비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당사자만큼은 아니겠지만, 사회복지사는 빈곤한 사람, 소수자들의 삶의 고통을 가장 많이 피부로 부딪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업무는 당사자들의 고통 안에 놓여 있고, 그 고통으로부터 업무가 시작된다. 지금까지 그 고통에 소극적으로 저항했지만, 사회복지사윤리강령에 대한 성찰과 역사적 경험은 그 고통에 더욱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할 직업윤리를 일깨우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사들의 조직된 힘이 있어야 한다.

지난 3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큰 화두가 무엇인가? 바로 보편적 복지국가의 추진이고 완성이다. 이 이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서울시장을 바꾸고 교육감, 지방자치단체장을 생산해 낼 만큼 어떤 이슈보다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이 복지논쟁에 열광했던 것은 그만큼 이 사회의 고통이 뼈 속 깊숙이 스며들어 있음을 증명한다.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의료, 양육, 주거, 교육, 실업과 빈곤에 대한 두려움은 성실한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고, 사회복지사는 이러한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당사자를 매일 일터에서 만나고 있다.

이제 이 고통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사회복지사들이 바깥세상으로 뛰쳐나가고자 한다. 지금까지 복지국가를 막강한 파괴력을 지닌 이슈로 만들어내는데 사회복지사들의 기여한 바를 찾아내긴 어렵지만, 앞으로는 이 이슈를 현실화하는 데 우리 사회복지사들이 앞장서기를 바란다. 사회복지사들이 일터를 사무실이 아닌 세상으로 확장하고 당사자들의 고통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여 세상을 바꿔 나아가는 땀방울이 되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달라야 한다. 착한 사회복지사, 복지하청업자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고 세상의 고통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뜻을 같이 하는 사회복지사들과 함께 모여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라는 단체를 준비하는 이유이다.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로 거듭나자

지난 시간 사회복지사로서의 역할에 대한 반성과 함께 내 먼저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 지난 7월 11일, 내가 속한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약칭 세밧사)’는 다른 복지국가운동단체들과 함께 그 첫 번째 저항으로써 ‘복지국가 만들기 시민촛불’ 문화제를 청계천에서 열었다. 이어 첫 번째 학습으로 8월 18일에는 “복지국가 청년캠프”도 주최한다. ‘세밧사’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세우기 위한 학습과 행동을 꾸준히 해나갈 것이다.

나는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사회복지사이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희망하고 있는, 그리고 조직된 힘을 열망하는 사회복지사 동지가 있다면 함께 세상을 바꾸는 땀방울이 되어보자는 말을 건네고 싶다. 내가 처음 사회복지사가 되고자 했던 그 꿈을 진정 이루고 싶다.